기사 (8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한국의 발전과 홍성, 충청남도청이전 행정 중추도시 한국의 발전과 홍성, 충청남도청이전 행정 중추도시 홍성발전의 기폭제가 된 것은 단연 충청남도청의 이전이다. 충남도청 이전지역이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대전과 분리되기 전해인 1988년 10월 ‘충남서해안권종합개발계획’을 시작으로 18년만인 2006년 2월의 일이다. 충청남도청이전추진위원회(위원장 김유혁)는 2006년 2월 12일 오후 4시 대전광역시 소재 한국토지공사 연수원에서 ‘최종예정지 평가단’의 평가결과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이 최고 점수를 얻어 충남도청이전 최종 예정지로 평가돼 발표됐다. 시·군 추천 인사 15명, 도의회 추천 인사 13명, 학회 추천 전문가 38명 등 66명으로 구성된 충남도청이전 ‘최종예정지 평가단’은 이곳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최종 예정지 선정 작업을 벌였다.충남도청이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4-27 13:52 홍성의 시민사회단체, 홍성사회 역동적으로 변모 홍성의 시민사회단체, 홍성사회 역동적으로 변모 1946년 5월 곽영순, 이한세, 김연수, 김현경 등이 주축으로 ‘대한부인회 홍성군지회’를 결성 한 것이 홍성에서 최초의 여성단체의 조직이었다. 창립 회원은 50여명이었으며 초대 위원장에 곽영순을 선출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손을 잡고 경찰의 활동을 돕고 5·10선거에 관여하는 등 친 정부 또는 극우 단체로 활동했다. 이후 여러 여성단체가 결성되면서 1981년에는 ‘홍성군여성단체협의회’가 구성됐으나 홍성의 여성단체들은 목적한 만큼 시민사회적인 활동이 미흡하다는 평이다. 우리나라 군사권위주의 시대에는 민간단체들이 관변단체와 재야단체로 양분돼 있었다. 권위주의시대통치체제는 국민을 통제하고 알 권리를 차단했으며 재정을 통제했다. 관변단체에게는 큰 혜택을 제공하고 재야단체에게는 압박을 가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4-20 14:56 홍성, 1952년 4월 초대 읍·면의회의원 선거 142명 선출 홍성, 1952년 4월 초대 읍·면의회의원 선거 142명 선출 혼란 속에서도 총선준비가 진행돼 4월 16일 등록을 마감한 결과 의석수 220석에 총 993명(무소속 400,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221, 이외 한민당과 청년단체 등)이 입후보 했다. 홍성에서도 5·10선거는 치러졌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현실화 됐다.홍성에서는 선거가 다가오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됐다. 한독당의 주요 인물들은 선거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참여자는 대부분 선거참여를 주장했지만, 일부에서는 반대하기도 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위원장인 손재학은 선거참여 쪽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는 대동청년단·애국부인회·서북청년단과 연석회의를 열고 선거참여에 대한 찬반논의를 해 손재학을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손재학은 대한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4-13 11:40 대한민국, 남과 북의 분단정부 수립과 홍성지역 상황 대한민국, 남과 북의 분단정부 수립과 홍성지역 상황 1947년 3월 미국은 트루먼 정부에 들어 처음으로 세계전략이 발표됐다. 소련과의 협조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단일의 정치·경제권으로 묶기보다는 사회주의권의 확장을 최대한 억제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확고하게 자유무역에 의한 자본주의 시장 권을 확립시킨다는 것이 구상의 골격이었다. 그것은 ‘트루먼독트린’, 또는 ‘마셜플랜’ 등으로 선포했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 봉쇄정책을 취함으로써 미소간의 냉전적 대결이 깊어져 갔다. 그러한 대립의 최전방에 한반도가 있었다.1947년 4월 미국은 소련에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청했다. 소련은 이를 받아 들여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1차 미소공동위원회와 마찬가지로 협의 단체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 소련 측은 비정치적 조직, 비사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4-06 11:49 반탁운동과 홍성지역 우익세력, 그리고 정부수립 반탁운동과 홍성지역 우익세력, 그리고 정부수립 미군정과 경찰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은 1945년 12월경부터 시작됐는데, 미군정은 구항면농민조합장 이차흥과 5명의 농민조합 간부들이 일제 말 미곡공출과정에서 부담을 주민들에게 전가하고 공출에서 빼돌린 구항면 이장 김호면의 쌀을 해방 직후 압수하여 주민들에게 분배했다는 이유로 폭력행위로 구속했다. 또 1946년 2월에는 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전명재는 해방 직후 환전상을 불법 감금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8개월 간 복역했다. 1946년 3월에는 인민위원장 한보국도 1945년 10월 광천의 일본인 금광업자가 금괴를 몰래 처분해 도망가려는 것을 적발해 압수한 일을 이유로, 조직부장 이태현, 보안대원 박태원 등과 함께 구속돼 10개월 형을 언도받았다.한편 홍성군인민위원회 사무실이 홍성읍사무소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3-31 09:10 8·15광복, 홍성의 좌파세력과 인민위원회 8·15광복, 홍성의 좌파세력과 인민위원회 치안유지 위해 발족했던 자치위·건준위 한 달여 만에 해체좌파 인민위원회 10월 1일 결성식, 홍성읍사무소에 사무실만해의 아들 한보국 독서회사건 치안유지법 구속 3년 옥고홍성군인민위원회, 농민조합을 기반으로 이강세 등 참여해한편 광복을 맞은 홍성의 경우도 친일인사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홍성에 자치위원회가 조직된 지 사흘째 되던 날 김병원, 유진익, 이병우 등 홍성의 유력 지주들이 출자해 만든 대금업을 하는 ‘동우조합’ 상무로 있던 윤상용이 자치위원회 사무실에 찾아와 자신들도 위원으로 참여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자치위원회 측에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3-24 13:07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소식과 홍성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소식과 홍성 손재학, 홍성에서 일본 패방과 민족의 광복소식 가장 먼저 접해8월 15일 손재학은 유승준과 일본 천황 항복소식 라디오로 들어8월 18일 홍성국민학교에서 홍성군민민중대회, 해방축하식 거행홍성군자치위원회, 일본인 군수 요청 옛 동헌인 안회당에 사무실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충남지역의 중심인 대전에서 발행되던 ‘중선일보’가 마침내 민족의 해방과 일본의 항복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특히 이날 중선일보의 기사는 전부 한글로 인쇄됐는데, 충남도민들은 오랜만에 ‘한글신문’을 보고 다시 한 번 감격했다. 당시 충남도청에서 한국인 직원의 정신적인 리더로 신망을 얻고 있던 충남도 광공부장 현석호는 해방이 된지 이틀 만에 전 직원을 도청광장에 집합시킨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이와 더불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3-18 10:26 3·1절 98돌, 그때 홍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3·1절 98돌, 그때 홍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3·1운동, 일제 식민통치에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 행동으로 옮겨홍성장터에서 3월 7일 ‘대한독립만세’ 부르며 시위 시작 촉발돼광천에서 3~5월 사이 10여 차례 30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해장곡면민 500여명 참여 홍성서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사건 기록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후 식민지 경영의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됐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 한관우 발행인 | 2017-03-02 15:38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