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모으면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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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모으면 길이 보인다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9.11.28 09: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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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3D프린터, 4차 산업혁명 등 새로운 조류가 밀려들며 상상과 현실의 간격이 커지고 있다. 사회는 우리에게 얽힌 지식의 결합에 대한 감각적이면서 종합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법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돼야 한다. 몰상식이 상식을 잠시 이길 수 있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인터넷상의 정보는 네티즌의 손을 거치면서 값싼 지식으로 둔갑할 위험이 크다. 현장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물어서 알게 된 정보가 더 가치가 있는 이유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세히 관찰하고, 그 대상에 자신만의 생각을 접속해야 한다. 상상력은 낯선 세상을 내가 느낄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만드는 것, 이게 진짜 능력일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역사 속에서 사람은 삶 속에서 발견한 지혜를 교육하거나 교환하는 수단으로 이야기를 이용해왔다. 인간에게 인지를 심어주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든 비극은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비극은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를 말한다. 그 주장에는 ‘스토리는 건축 설계도처럼 구조를 짜야 한다’는 뜻이다. 스토리텔링의 이야기 결합 구조를 ‘플롯’이라 한다. 플롯은 인과관계라는 논리에 주목한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사건은 인과관계라는 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명분과 실리가 충돌할 때는 실리를 택하는 편이 낫다. 왜소한 모양만 갖출 수 있다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글 같은 삶에서 사는 길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서희의 ‘강동 6주’ 등은 이런 사례로 평가된다. 최근 주목받는 홍콩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아시아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곳이다. 중국이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곳이다. 중국은 반인권적 진압을 떨치고 시위에 담긴 대의를 존중해야 한다. 굳이 등소평의 ‘흑묘백묘론’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시진핑의 정치적 안목은 아쉽다. 국제사회는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술 없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다변화돼 있다. 시스템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똬리 형태로 몸을 감은 생태계를 들여다보기조차 힘들다.

브랜드는 상품뿐만 아니라 지역이나 나라 어떤 고유명사도 브랜드가 될 수 있고 개인의 이름도 그렇다. 와인(프랑스), 시계(스위스), 고급차(독일) 등 한 나라나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도 있고, 청량음료(코카콜라), 휴대폰(갤럭시), 김치냉장고(딤채) 등 한 업종이나 제품군을 대표하는 브랜드도 있다. 소설 한권을 쓸 때도 독자의 예상동선을 배반하고 전환점을 줘야 평범한 글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의 지도자는 부끄럽다, 정치 시스템의 변화를 매력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평가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 포퓰리즘 정치를 지향한다. 역사의 주인공은 전 세계 6대륙에 사는 ‘너와 나’다. 지도자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과 동일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역사의 이해에 있어 ‘지적 역량과 역사적 통찰’은 필수다. 아울러 감동을 줘야 한다. 감동은 타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려면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습니다. 침엽수 사이로 뜨는 초사흘 달, 그 옆을 따르는 별의 무리에 섞여 나도 달의 부하, 별의 졸병이 되어 따라다니고 싶습니다.” 도종환은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에서 우리에게 공감을 부른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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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2019-11-28 09:43:31
아침에 좋은 글을 읽으니 생각이 풍요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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