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자서전 내 인생의 봄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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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 자서전 내 인생의 봄날-1
  • 홍주일보
  • 승인 2020.01.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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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할머니
까막 눈에 글씨가 보이니 세상이 보였다

내 이름은 김상연이다. 쇠 금(金), 서로 상(相), 연못 연(淵). 
할아버지한테 한자의 뜻을 듣기만 했다. 누가 지어줬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위로 언니, 오빠가 있고 나는 셋째 딸이다. 참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고 놀았다. 땅뺏기도 하고 자치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친구들과 놀았다.
 

우리 아버지는 신사양반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자손들 사탕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고 하셨는데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몹시 그립다. 지금 내 머리 속에서 아버지를 그려보면 영화배우처럼 멋쟁이시다.

우리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딸에 깔끔하고 성실하셨다. 얼마나 장판을 깨끗이 닦으셨는지 며느리가 방바닥 구멍 난다고 할 정도였다. 기저귀를 반듯이 열 맞춰 널어 말려서 손주들도 키웠다. 그렇게 보고자라서 그런지 딸들이 시집가서 살림하는데 어려움 없이 잘해냈다. 어머니는 길쌈, 바느질, 혼인집 음식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어서 다 쫓아다니며 일을 해주고 할 정도였다. 명절에도 남들은 명주에 물들여 울긋불긋 입었는데 우리는 세로치마 분단저고리로 옷을 해 입히셨다. 그렇게 부지런하시고 깔끔하시던 어머니는 고등학교 다니는 손주를 93세까지 돌보시다가 갑자기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큰언니, 나 막내여동생
언니를 좋아해서 쫓아다니며 속을 많이 썩였다. 오지말라고하면 숨었다가 또 쫓아가곤 했다. 언니가 바느질하면 못하게 하고 놀자고 졸라서 언니가 인두로 내 발을 지지기도 했다. 그런 언니가 시집갔을 때는 너무 서운했다. 그림 속에서 짧은 머리는 일제 강점기때 잡혀가지 않기위해 선머슴처럼 짧게 잘랐다.

어린시절 친구 옥순이랑 자치기를 했다. 서로 한번씩 번갈아가며 이겼었다. 내가 먼저 시집간다고 옥순이가 엄청 울었다. 지금도 옥순이는 금마에 산다. 문해교실에서 지금도 만난다. 만나면 집에 놀러오라고 하는데 나는 신랑이 없어서 잘 안가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까지 둘도없는 친구사이다. 할아버지가 엄해서 시집가기 전에는 바깥출입을 못했다. 시집가서 첨으로 언니네 가본게 다이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남편이 내 마음에 썩들지 않았다. 어른들이 짝지어준 사람이라 참고 살았다. 시집 식구는 시할머니, 시어머니까지 계셨다. 나는 친정에서 술 드시는 사람이 없어서 술시중을 할 줄 몰라 시할머니한테 구박을 많이 받았는데 시어머니는 늘 내 편이 되어주셨다. 친정엄마는 나를 낳기만 했지 따뜻한 사랑을 주실 줄 모르셨다. 시어머니는 지혜로운 분이라서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하셨다. 나는 나이가 들면 시어머니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혼할 때 24, 남편도 동갑이었다. 남편은 군인이었다. 작은 할아버지가 홍성 중학교 교장이셨을 때 학생하나를 골라 중매해주셨다. 작은 할아버지가 사진을 보여줘도 싫다고 했는데 걱정 말라고 해서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은 곱고 차분하고 욱하는 것도 하나 없이 성실했다. 처갓집 된장을 좋아해서 뭐든 까다롭지 않게 맛나게 먹었다. 그러던 남편이 69세 되던 해에 갑자기 손바닥이 간지럽다고 하더니 다음날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칠순잔치에 먹는다고 더덕주를 담가뒀는데 그 더덕주는 동네 아저씨들 몫으로 나눠 마셨다.
 

나는 아들만 셋을 두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40이 넘어 갑자기 죽게 되어 늘 마음이 아프다. 아들 셋이라도 층층 시할머니, 시부모가 계셔서 제대로 안아보고 업어보지도 못하고 밥 때 되면 젖만 물려봤다. 그때 시절에는 아이 낳았다고 맘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형제들끼리 잘 싸우지도 않고 둘째가 걸레 빨아서 던져주면 첫째가 방을 닦고 서로 다정하게 지냈다. 지금도 우애있게 잘 지낸다. 먼저 간 둘째 아들과 같이 살았었는데 딸같이 참 잘했다. 늘 보고싶다.

큰 아들이 네 살 때 시할아버지가 말 안듣는다고 아들이랑 같이 쫓아냈다. 아들이 광문의 동그란 모양을 과녁삼아 새총을 쐈는데 시할아버지가 당신 죽으라고 쏜다며 막무가내로 쫓아냈다. 그래서 아들이랑 뒷산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밤에 몰래 들어왔다. 그때 서러워서 눈물이 많이 났다.

어린 시절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제일 부러웠고 제일 하고 싶은 일중에 하나였다. 그것이 한이되서 자식 낳으면 어떻게든 가르치려고 노력해서 대학까지 다 공부시켰다. 지금은 뒤늦게 한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눈도 어둡고 잘 안보이고 자꾸 눈물이 나서 어렵다. 게다가 공부한 건 까먹고 잊는 게 일쑤다. 한쪽 귀로 들으면 한쪽 귀로 나가고 집에 가면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받침 쓰고 읽는 게 말할 때랑 달라서 제일 어렵다. 그래도 이제라도 배울 수 있어 참 좋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공부하게 되면 열심히 해서 반장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모르고 살아온 80평생, 가난 때문에 학교도 못 다녔다. 답답해도 답답한 줄 몰랐다. 서럽고 부끄럽기만 했다. 까막눈이 이제 눈을 떠 글씨가 보이니 세상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내 이름 석자, 자식들 이름, 손자, 손녀 이름, 집 주소 쓰기…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들이 모두 나랑 같이 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웃고 떠들고 지난 날을 얘기 나누는 것이 이제는 정말 행복하다. 예쁘게 즐겁게 웃으며 환한 세상 잘 늙어가고 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모두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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