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홍주의병 청양 화성에서 첫 패배를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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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홍주의병 청양 화성에서 첫 패배를 당하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5.0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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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6>

하우령 고갯마루 병오의병주둔비 역사적 장소 증명
홍주목사 이교석 ‘3일 뒤에 성을 잃게 된다’으름장
안병찬 ·박창로 등 의병수뇌부 체포 정산의진 해산
합천전투 패퇴 의병 홍주성(洪州城) 탈환을 준비해

▲ 지금의 화성장터인 모듬내장터는 충남의 최고봉 오서산과 구봉산 등 차령산맥으로 가려진 아늑한 곳으로 청양에서 대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사진은 합천초등학교의 모듬내관 전경.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병오홍주의병의 첫 기병지인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 하대장리 광시장터)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동의 초롱산을 넘어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朝陽門) 밖 하우령(夏牛領, 지금의 하고개)에 진을 쳤던 것이다. 본래 초롱산이라는 이름은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초롱산 아래 살았던 고려의 충신 이성(李晟)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성은 고려시대의 충신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라고 전해지는데, 고려말엽에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홍주에 내려와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학식과 인품이 출중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제자가 되기를 청할 정도였으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줄 인물들이 필요했고, 이미 이성의 인물 됨됨이를 잘 알고 있던 이성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지만 이성은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이성계의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우령은 홍성읍에서 서산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홍성읍 우회도로와 구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구항면과의 경계지역인데, 이곳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하고개’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는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 ‘병오의병주둔비’가 세워져 있어 역사적 장소임을 오늘날까지 증명해 주고 있다.
창의대장 민종식은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 수가 6명이라고 한다. 만일 그들을 잡아 머리를 가져오면 현상금 1000냥을 주겠다”고 방(榜)을 붙였다. 이 소식이 대장소(大將所) 안에 전해지면서 사태가 위급해지자 민종식은 “홍주주재병정이 어찌 대포를 쏘겠는가? 즉시 홍주성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외치며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민종식은 2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성문에 이르렀다. 이때 홍주목사 이교석은 대장 한명과 종사관 두 명만 들어오라고 한 뒤 “3일 후면 성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니 퇴군(退軍)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 병오홍주의병의-첫-기병지인-예산군-광시면-하대장리-전경

다음날 오늘날의 중위계급에 해당하는 부위(副尉)출신인 이세영이 의병진에 합류했다. 1896년 홍주의병에 참여한 이후 군에 들어가 계급이 부위에까지 오른 그의 참여는 의진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3월 16일(음력, 2월 22일) 의진은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군제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러한 의병의 전략은 홍주성이 일본군의 대포로 무장돼 있는 등 방어태세가 견고한 반면 의병들은 훈련도 잘 되지 않았고, 편제도 제대로 짜여지지 않았으며 화력도 미약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던 곳으로 풀이된다. 또한 광시에서의 의병출진이 이미 중앙에까지 보고됨으로써 일본군과 관군이 서울과 공주에서 출병하고 있었던 점도 깊이 고려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홍주목사 이교석이 ‘3일 뒤에 성을 모두 잃게 된다’는 으름장이 바로 이점을 가리킨 것이었다.

광시의병들이 공주성 공격으로 목표를 바꾼 것은 이세영의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일본군과 공주의 관군이 홍주성으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사이 주둔 병력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공주부를 공격함으로써 선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광시의병들은 진용을 갖추어 공주를 향해 진군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두가 청양 비봉면 중묵리 묵방(默坊, 일명 먹고개)에 이르렀을 때 “공주관군과 서울 병력 200여명이 청양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중묵리는 예산 광시에서 국도 29호선 청양 비봉과의 경계지점으로, 공주에서 오면 청양 운곡면 효재리와 합치되는 지점이다. 지금은 길목 입구에 중묵슈퍼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중묵리’라는 마을 표지석이 있다. 공주에서 청양, 청양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이라 의병과 관군이 마주치게 되는 길목인 셈이다. 따라서 의병들은 진로를 바꿔 청양 화성의 모듬내장터로 가서 진을 치고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이들은 모듬내장터인 지금의 화성 산정리로 갔던 것이다. 지금의 화성장터인 모듬내장터는 충남의 최고봉 오서산과 구봉산 등 차령산맥으로 가려진 아늑한 곳으로 청양에서 대천으로 가는 길목에 청양장, 정산장 등과 함께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 청양 비봉면 중묵리 묵방(默坊, 일명 먹고개)

하지만 이곳은 병오의병의 첫 패배가 일어난 곳으로 다음 기회에 승리를 위한 담금질이 시작됐던 곳이다. 홍순대(洪淳大)의 ‘해암사록(海庵事錄)’에는 “공주의 병력이 묵방에 도착해 의진이 이동한 흔적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탐문하여 화성으로 쳐들어 왔다. 그들은 의병이 진을 친 부근으로 왔다. 그들은 의병이 진을 친 부근에 잠복하였다가 밤을 틈타 총격전을 벌였다. 놀란 의병들이 목숨을 구하려고 서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거나 산간벽지로 몸을 감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병진은 화성의 합천(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합천)에 진을 쳤다. 이때의 상황은 일본인의 기록에도 “3월 16일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들은 청양 북쪽 2리 지점인 묵점(默店)에 모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소식을 듣고 공주 주재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급파되어 홍주군 관군과 함께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에 쳐들어와 잠복하기에 이른다. 의병들이 합천에 유숙하고 있음을 확인한 일본군은 이들을 습격하여 전원을 사로잡으려 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 5시 합천의 숙소를 습격 모두 칼을 뽑아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적(의병)들은 당황하여 화승총으로 저항하였으나 23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민종식 이하 몇 명은 위기를 모면하여 뒤편의 산속으로 달아났다. 이들을 백방으로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안병찬과 박창로 등 주요 의병수뇌부가 체포되어 정산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 합천전투에 대해 ‘황성신문’에 따르면 체포된 의병은 안병찬을 비롯한 26명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안병찬의 기록을 토대로 안병찬이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갇힌 것만으로 알았으나 이 기록을 통하여 이외에도 20여명의 의병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헌병들은 이후에도 홍주일대의 의병을 체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홍주군 주동(舟洞)에 살고 있던 전판서 조동희(趙同熙)가 의병의 운량관을 하였다 하여 그를 체포, 공주부 감옥에 구속시키고 가택 수색을 하여 집안의 휴지까지 몰수해 갔다고 한다.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의병들은 보령, 예산 등 각지로 흩어져 활동을 계속했다. 이남규가 공주부 관찰사 서리 곽찬(郭瓚)에게 방면할 것을 편지로 설득하여 그해 5월 5일(음력 4월 12일)에 석방됐다. 그리고 이들은 곧바로 홍산의거에 다시 참가했다.

황성신문 1906년 3월 29일자에 곽찬이 올린 내부 보고에 의하면 “홍주군수 보고에 의하면 의병 수천명이 보령과 청라 등지에 둔취하여 지난날 총기와 탄약을 탈취 당함을 분하게 여겨 기일을 정해 우선 홍주군에 들어가 성을 함락시킨다고 선언함에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라고 해 의병들이 합천전투에서 무기를 탈취당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있으며, 홍주성(洪州城) 탈환을 위해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의병들은 이후에도 보령과 청라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보령 청라에는 당시 지산 김복한이 은둔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렇듯 병오홍주의병(丙午洪州義兵)들의 일본군과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됐으며, 이 싸움에서 최초의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1906년의 홍주의병은 사실 성과도 없이 전투다운 전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와해됐던 것이다. 이러한 패배의 아픔은 미래를 기약하는 또 다른 충전의 계기가 되는 것일까. 두 달 후에 다가올 대승전을 눈앞에 둔 아픔이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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