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열광
(지난 1일 이집트의 지중해연안도시 포트사이드의 한 축구경기장에서 흥분한 관중들 간에 벌어진 난투극으로 최소 73명이 사망하고 1000명 가량이 부상했다는 외신보도를 보고 이 글을 쓴다.)
스포츠에서의 대중의 승리감은 대중의 적대감을 전제로 한다. 상대를 이겨야한다는 욕구는 상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욕구와 같다. 승리감의 도취 속에는 패자에 대한 배려는 없다. 이것은 원초적인 인간의 정복욕이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이고 이성의 문제는 아니다. 승자에 대한 환호는 자기우월감의 대리만족이다. 스포츠에서의 승자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순간적인 대중의 이성의 마비이다. 집단적 최면이다.
국제스포츠중계 텔레비전 앞에서의 우리나라 팀에 대한 대중의 환호는 애국심과는 다른 것이다. 맹목적인 일체감이다. 우리나라 팀이 출전하는 국제 스포츠경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애국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텔레비전 앞에서의 환호가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가? 우리사회의 도덕성을 높이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또는 우리의 국위를 선양하는가?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우승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것을 본다면 국위선양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기도취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복잡하고 어려운 삶에 지친 대중의 스트레스 해소에는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일시적인 현실 도피이다.
올림픽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참가하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라는 올림픽의 이상은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정자나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하여, 또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소련을 비롯한 동독 등의 공산국가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또 대중의 스포츠에 대한 열광을 부추기는 데에는 상품광고를 위한 재벌기업의 역할이 한 몫을 하는 것이다. 실업구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회사에 대한 가공의 이미지나 인식을 대중의 머릿속에 심어 넣는 것이다. 어느 기업에 속한 스포츠팀이 경기에서 우승하였다면 그것이 그 기업근로자의 체력이나 기업의 생산품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며 또 유명한 운동선수나 연예인 광고모델이 실제로 상품의 품질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광고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용자가 사용해 보아서 그에 대한 평판에 따라 스스로 선전되어야 마땅한 것이지 돈을 들여서 별도로 선전하는 것은 진실되고 온당한 일이 아니다. 선전에는 거짓이 따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품에 대한 광고도 아니고 단순히 회사의 이름이나 이미지를 인식시키기 위하여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구단을 운영하거나 유명선수를 모델로 이용하는 것은 그 비용이 결국은 소비자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며 또 이렇게 하지 못하는 중소기업에게는 상대적으로 선전경쟁에서 불리하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올바른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동안은 모르는 사이에 돈 많은 대기업의 잠재적인 선전에 얼이 빠져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수출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현실에서 불가피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은 물론이고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이나 언론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이 서로의 이익과 생존을 위한 역학관계로 어쩔 수 없이 맞물려 있음으로 해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현상에 비추어본다면 우리사회가 근면· 검소· 절약하고 사랑과 평등을 지향하는 참다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와 낭비와 우월감과 욕심과 차별을 조장시키는 방향으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이러한 탐욕적인 저질의 상업문화가 얼마나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정신능력은 생각을 통하여 성숙하고 향상되는 것이다. 저질의 코미디나 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는 순간은 당신의 생각을 빼앗기는 것이다. 경기장에서의 참사는 남의 나라의 일만이 아니다. 여러모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