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33

2020-03-18     한지윤

혜법 스님이 미리 알고 자기로 하여금 노화를 구하게 한것이리라.
이윽고, 지달과 노화는 풀덤불 위에 나란히 누웠다.
먼저 지달이 여태까지 지나온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혜법스님이 자기를 오늘 갑작스레 암자를 떠나게 한 것도 아마 노화를 구해 내라는 배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화도 혜법스님의 천리안에 몇 번이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던 노화도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상세히 지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경황을 들어보니,
고구려 군사에게 붙들린 비리마을의 젊은 여인들은 그 날 밤으로 강 건너 고구려 본진으로 끌려갔는데 모두 열 세명이었다.
그중에서 노화가 제일 나이가 어렸고, 물론 얼굴도 제일 미인이었다.
이를 깨달은 노화는 곧 비상수단을 쓰기로 했다.
본인에 도착하기 전에 노화는 군사들이 든 햇불에서 떨어지는 숯검정을 주워서 얼굴에 문지르고 사지에도 문질렀다.
그리고 진흙으로 얼굴을 범적으로 만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열심히 문지르고, 닦고, 또 닦고는 문질러서 그야말로 새까만 깜둥이를 만들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침을 질질 흘리고, 한 쪽 눈을 가시로 찔러 퉁퉁 부어 오르게했다.
본진에 도착하자, 장수가 나와서 잡아온 여인들을 모두 자기 저택으로 보내게 했다.
새벽부터 걸어서 하루 종일 걸리는 먼 곳에 그의 저택이 있었다.
변방 장수의 집으로서는 분에 넘치게 호화로운 집이었다.
마치 궁궐처럼 크고, 정원은 사방이 십여 리나 된다고들 했다.
장수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 그 집 주인인 장수가 친히 나와서 비리마을에서 붙들어 온 여인들을 앞에 놓고 심사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여겨 훑어 보고선 두 패로 가르는 것이었다.
그중에 얼굴이 좀 반반한 여인은 왼쪽 줄, 얼굴이 추하게 못생긴 여인은 오른쪽 줄로,
노화는 요행히도 오른쪽 줄에 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시커먼 얼굴에 한 눈이 보기 흉하게 퉁퉁 부어있고, 게다가 침을 질질 흘리는 반편 시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이 붙잡혀 간 비리마을 여인들까지도 그 아리따운 몸매의 노화가 그렇게 된 것을 난리통에 정신이 나간 것으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왼쪽 줄에 세운 여인 다섯은 장수의 첩이 되고, 오른쪽에 세운 여인 일곱은 종이 되었다.
노화는 갖은 학대를 받으면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 항상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 집 담장 밖으로만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백제로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담장을 나갈 재간이 없었다.
그 집에는 노화처럼 백제, 또는 신라, 말갈 등지에서 붙잡혀 온 여자들이 백여 명이나 있었다.
그러니 수비도 그야말로 철통같을 수 밖에 없었다.
노화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재치로 그 산돼지같은 장수놈의 첩이 되는 것만은 면했지만, 종살이도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눈물의 세월이 3년 흘러갔다. 이제는 고국 백제로 돌아갈 희망은 까마득해졌고, 따라서 사랑하는 지달을 다시 만날 길도 영영 멀어지는 것 같았다.
절망의 나락에서 자살을 기도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 며일 전이었다. 그 장수의 아우가 고구려 서울에서 왔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본가로 돌아가는 아우편에 노비를 몇 사람 보내고 싶었던지 장수는 아우에게 그 중 힘께나 쓸 것 같은 종 십여 명을 골라 데리고 가라고 했다.
아우는 여자 종들을 불러 놓고 심사를 했다.
노화 차례가 되자, 아우는 입을 딱 벌리는 것이었다.
“이런 미인을 노비로 쓰다니…… 쯧쯧 형님은 여자 보는 눈이 틀렸단 말이야.”
그리고는 노화를 제가 데리고 갈 줄에 세웠다.
노화는 눈 앞이 깜깜했다. 백제가 더 먼 고구려 서울로 끌려가는 건 고사하고 이제는 본색이 드러나 첩이 되게 되어버린 것이다.
노화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오래 눈에 안 띄고 지내왔기에 방심이 되어 얼굴을 추하게 망가뜨리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다.
다음날로 노비 아홉명과 노화는 수레에 실려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일행의 수레가 열두 대였는데 열 대의 수레 속에는 그 장수가 왕을 비롯한 서울의 조정 대신에서 보내는 금은보화가 들어 있었고, 두 대의 수레에 노비로 끌려가는 여인들이 실렸다. 물론 노화도 노비 속에 섞여 실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