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38

2020-04-22     한지윤

허위대가 크고 뚝심이 있어 보이는 책계왕은 성품도 강직할 뿐만 아니라 의지 또한 굳세어 마땅치 못한 일이나 맺고 끊는 것이 분명치 못할 때는 그 일을 그대로 넘기지 않는 성품이었다. 
이러한 성품은 지금 왕비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대해지는 고구려의 힘을 꺾어 보려는 뜻에서 한족의 영토요, 한족의 후예인 대방국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 들였던 것이다.
대방국의 힘을 빌어 고구려의 침범을 막게 하고 그것을 틈타 백제의 힘을 키워 보자는 속셈이었다. 대방국 또한 자주 고구려의 침입으로 괴로움을 받고 있었던 터라 먼 곳에 있는 본국의 힘을 빌리고 도움을 청하느니 이웃한 백제의 도움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수월할 듯 해서 그 나라의 왕녀를 백제의 왕비로 보냈던 것이다.
젊은 새 왕비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반짝거리는 눈매나 얼굴이며, 머리 또한 매우 총명해 보였다. 
본래부터도 왕녀가 총명하다는 소문은 파다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계왕의 마음은 상당히 흡족해 보였다.
책계왕은 은근히 까다로운 절차와 그런 시간이 빨리 끝나서 왕비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젊은 왕은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우선 그 무엇보다도 수려한 그녀의 미모나 하나 하나를 말하는 그녀의 총명함에 어느덧 넋이 나갈 정도였다.
대방국의 얘기도 듣고 싶었고 한인들의 얘기도 듣고 싶었으며, 그 예쁜 왕비와 한시라도 빨리 침소에 들고 싶었다.

왕비와 침소에 들게 된 왕은 왕비와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여인들과 가까이 해 본 경험이 없었던 왕인지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왕비가 부끄러움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고 그 행동이 불만이었다.
책계왕은 왕비를 향해 말을 건넸다.
“왕비, 고개를 드시오!”
“네에ㅡ”
왕비의 목소리는 또 모기 소리만하게 조용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왕은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말했다.
“고개를 들라고 하지 않았소!”
왕비는 순간 당황하면서 얼른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수줍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대단히 타는 그런 왕비였다. 책계왕은 순간 짜증스럽기도하고 왕비가 얼른 고개를 들어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 불만스럽기까지 했다.
“비, 고개를 들라하지 않았소!”
채근하듯 왕이 말하자 왕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을 한 듯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왕비를 본 왕은 순간 양 볼이 잘 익은 듯한 사과빛처럼 볼그스레한 얼굴빛임을 확인하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러나 왕비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살며시 돌렸다. 그 때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왕은,
“고개를 바로 돌리시오.”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짓궂게도 보이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여자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쑥맥같이도 보이는 책계왕이었다.

왕비는 고개를 바로 돌릴 듯 돌릴 듯 하다가도 제대로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도무지 이러는 것이 못마땅한 왕은,
“내 비록 비를 볼모로 데려오지는 않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싫은 백제로 시집을 왔소?”
이 무슨 천부당 만부당한 힐책인가. 설마 백제가 싫고 백제왕이 싫었다면 어떻게 한인의 몸으로 백제에 시집을 왔을 리가 있는가. 왕비는 곰곰이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아니옵니다.”
왕비를 백제로 시집을 온 것이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왕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면 백제가 싫지 않으면, 그럼 이 몸이 싫단 말이요?”“천만에 말씀이셔요. 마마가 싫사오면 어찌 백제로 왔사오리까, 천부당 만부당 한 말씀이시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소녀 정말 몸돌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때와는 정말로 용기있는 말이었다.
왕비의 말소리는 작지만 또렷했으며 한마디 한마디가 분명했다.
“비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데 어찌 자꾸 얼굴을 감추려 하는 것이오.”
책계왕의 이 한마디에 왕비는 금방이라도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커다란 기쁨을 맛 볼 수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그이가 지금까지 어느 여인과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대방국에서 백제로 오기 전까지는 새로 임금이 된 책계왕의 주위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나 백제에는 미녀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었고 또한 왕자의 몸으로 체구가 장대하고 얼굴 또한 미남형이라 어떤 여자든지 얼굴만 보면 반하기 십상인 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의 말을 들어보면 여인들을 가까이 해 본 그런왕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