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56

2020-09-01     한지윤

도미는 붉은 피를 얼굴에 철철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도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는 이미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 그의 몸은 돛대도 업고 삿대도 없는 자그마한 배에 실려 강물을 따라 떠내려 보내고 있었다.
한편, 가짜 임금을 감쪽같이 속여서 돌려보낸 도미의 아내는 한결 더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렸지만 그날도 그 이튿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속인 것이 탄로난 것인가? 아니면 그이가 잘못 되었는가? 아니면……’
도미의 아내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을 조이고 있을 때에 임금이 보낸 또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봐라!”
“이집에 누구 없느냐?”
“이집 안주인을 별장으로 모시라는 어명이요?”
도미의 아내는 가슴이 섬뜩하였다. 당장 벽에 머리를 박고 죽으면 일신상의 봉변을 면할 수도 있으나 우선 남편의 생사를 몰라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죽기 밖에는 더하랴?’
도미의 아내는 이렇게 마음을 다져 먹고는 나인들을 따라 임금이 나와 있다는 별장으로 따라갔다. 임금은 그를 보더니 반색하면서 말했다.
“과연 실물을 보니 듣던 소문과 똑같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코 밑에 천하일색이 있는 줄도 꿈에도 몰랐구나!”
그 목소리를 듣고 도미의 아내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엊저녁의 그 임금이 아닌 다른 임금이 아닌가? 그는 눈을 딱감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저쪽에서도 속이고 이쪽에서도 속이고 끝까지 모든 것을 속이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구나!’
임금은 임금대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도미의 아내를 내려다보고 좌우를 살피더니 신중해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엊그제엔 발칙한 짓을 하더니 이제는 좀 어떠냐? 과인의 말을 따르겠는가?”
도미의 아내는 이내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웃음지르며 대답을 했다.
“엊저녁에 오신 사람은 가짜 임금이시었다는 사실을 소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가짜 임금님 행세를 하시는 것을 알고 골려 주었을 뿐 소인은 다른 아무런 의도도 없었습니다만 대왕께옵서 진정 그러시다면 소녀로서는 그저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대왕님!”
“그게 참말인가?”
순간 임금은 그의 아양에 대뜸 간이 사르르 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왕이시여, 그럼 참말이 아니고요. 그런데 소녀는 필경 유부녀로서 남편이 있는 몸이고 지금은 남편이 집에서 없어진 이후로 남편의 생사도 모르는 몸이 되어, 어찌 대왕께 몸을 허락할 수 있으로리까?”
도미의 아내는 이렇게 좋은 말로 순종하는 체하면서 우선 급한 것이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음ㅡ, 도미 말인가? 그자는 임금을 속인 죄로는 마땅히 죽여버렸어야 했겠지만 너의 안면을 보아서 목숨만은 살려 주었으되 임금을 속인 괘씸죄는 어찌할 수 없어 그 벌로 너의 아리따운 모습을 앞으로는 다시 볼 수 없도록 눈알을 빼버리고 목숨만 살려서 배에 실어 강물에 떠내려보냈다.”

그 말에 도미의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하였으나 워낙 모진 마음을 먹은 도미의 아내였던터라 용케도 그 위험한 순간을 참아내었다.
어쨌든 남편을 죽이지 않고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모질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또 무슨 할 말이 더 있는가? 이제부터 너는 나의 것이다. 오늘부터는 나와 살을 맞대고 사는 게야. 왕비야, 왕비!”
그러자 임금은 도미의 아내를 강제로 끌어안으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도미의 아내는 침착하게 히죽히죽 웃어보이며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임금의 손을 가벼게 잡는 척하며 가볍게 몸을 뒤로 물러앉았다.
“더 드릴 말씀도 없고 할 말도 없습니다. 대왕께서 이 비천한 몸을 버리시지만 않으신다면 기꺼이 대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가 또 뭐야. 그런데라니……”
“그런데 소인은 지금 이미 남편을 잃어 버리고 혼자가 된 몸이오니, 정조를 지킬래야 지킬 수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사오니 그 어찌 감히 그 부분을 어기리이까. 그런데 지금 저는 한 달에 한 번 맞이하는 그 때가 되어서 온몸이 더럽사오니, 청하옵건대 몸이 부정해서 그러하오니 며칠만 참으셨다가 깨끗이 목욕을 하고 대왕을 맞이하옵고 싶어서요.”
“요 발칙한 것이 또 과인을 속이려 하고 있구나!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속지 않는다구!”
임금은 더 이상 속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내빼는 길밖에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