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족(濯足)

2012-07-12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는 계절이다.
며칠 전 몇몇 벗들이 모여서 탁족을 오겠다는 전갈이 왔고, 기다림으로 변해버린 기쁜 마음은 시간을 멈추어 놓는 듯 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라고 했고, 붓다는 “좋은 벗은 인생의 전부”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벗은 인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나누는 스승과 제자가 되며, 사회적으로는 세상을 걱정하는 동지라고 하겠다.

후한 시대에 곽임종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친구가 비를 맞으며 찾아오자, 비를 무릅쓰고 부추를 베어 부침개를 만들어 대접하였다고 한다.<夜冒雨至 翦韭作炊餠食之> 이것은 비가 오는 밤에 불쑥 찾아오는 친구나, 넉넉지 못한 살림이지만 반가움에 비를 맞으며 부추를 베러나서는 곽임종 간에는 이미 세속의 도리나 격식을 떠난 진정한 벗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동양화는 붓보다 마음(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이 앞선다는 의재필선(意在筆先)과, 그림에서 나오는 기운이 이미지 전달을 넘어서 소리 즉, 말과 글처럼 분명하게 전해져야 한다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기본으로 그려진다.

근래 들어 탁족이라는 말을<그림>에서처럼 시원한 강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하게 더위를 식히는 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지침이 되는 교훈이 들어있다.
 

 

 


탁족도는 정적(政敵)들의 중상모략으로 귀향을 가면서도 결코 남의 탓을 하지 않았던 굴원의 고사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탁족도를 통해 사람들이 강물에 발을 닦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강물의 흐림에 있듯이, 모든 것은 상대의 허물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임을 알라는 맹자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살림살이 맞게 조촐하게 차려진 음식과 인생을 논할 수 있는 벗들이 그간의 공부를 털어 놓고 한바탕 논쟁을 벌이는 탁족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피서(避暑)이며, 안빈낙도를 즐기는 장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요즘은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어 버렸다는 어느 어르신의 걱정스러운 말씀처럼 구경거리가 있는 곳이면 거리와 비용을 마다 않고 사람들이 몰려듣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체험과 공부를 테마로 하는 각종 프로그램들이 생겨나지만 이것 역시 프로그램을 찾아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래서 올 여름에는 눈에 보이는 것(메스컴)들이 온통 산과 들로 불러내고 맛있는 먹거리와 폼 나는 여행용품을 구매하라고 아우성치는 소비일변도의 세상을 잠시 떠난 나름대로의 탁족을 즐기는 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을 이 글에 담아본다.
 

오서산 정암사 범상스님<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