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이 된 '나으리들'의 술상
대전 충남 의회 관료들 추태 술판
2012-11-19 김선미 디트뉴스 주필
■ 음식인데 오죽하면 '술 먹은 개'라는 표현 나올까
1995년 백악관 경호실 비밀경찰국 요원들은 한밤중 백악관 인근의 거리에서 술에 취해 내의바람으로 배회하는 거구의 한 외국인을 발견했다. 당시 백악관에서는 미-러 정상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외국의 요인도 인근에 여장을 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으려다 경호실 요원들에게 발견된 취객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피자가 먹고 싶다"고 횡설수설했다. 취객은 다름 아닌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차 워싱턴을 방문한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뒤늦게 밝혀진 비하인드 스토리다.
'노크귀순'도 아니고 대통령이 한밤중에 속옷차림으로 홀로 숙소를 빠져나와 거리를 배회하기까지 러시아 경호원들은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기막혀 말문이 막힐 정도다. 보드카를 너무 사랑했던 옐친은 술과 관련한 숱한 기행과 실수담을 남겼다.
그래도 그렇지, 일국의 대통령이 정상회담차 간 남의 나라에서 만취해 속옷차림으로 밤거리를 배회하다 상대국 경호원들에게 발각됐다는 것은 거의 '병자' 수준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술 취해 내의바람으로 워싱턴밤거리 배회한 옐친
"술도 먹는 음식인데 오죽하면 그렇게 못 먹게 악다구니를 썼겠어."
언젠가 목욕탕에서 들은 한 중년여성의 한탄이다. 전후맥락을 보니 평소 폭음 때문에 엄청나게 싸웠던 남편이 그 무렵 알코올 중독이 원인이 돼 세상을 떴던 것이다. 그토록 사납게 대했던 남편이었지만 막상 세상을 뜨고 보니 여러 가지 회한이 남았던 것 같다.
대통령이라는 직분까지 망각케 하는 술. 술 때문에 폐가망신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했던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파문도 '그놈의 폭탄주'때문이었다. 이후 검찰은 낮술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밖에도 공직자의 경우 술로 인한 실수로 곤욕을 치르는 경우는 물론이고 문제가 돼 옷을 벗은 사례도 드물지 않다.
'술도 먹는 음식인데…' 낯선 아주머니의 한 맺힌 넋두리가 아니어도 술이 그 자체야 무슨 죄가 있으랴. 실제 술을 예찬한 동서고금의 예화는 무수하다. 생명수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히 절제 할 수만 있다면 긴장감을 풀어주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삶의 에너지를 북돋게 하는 윤활유가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 '그놈의 술' 때문에 코피 터지고, 음식 엎어지고
그런데 문제는 '그놈의 절제'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신다고 술꾼들에게는 잘 통제가 안 되는 모양이다. 백약(百藥)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만병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대전, 충남, 공직사회에서도 '그놈의 술' 때문에 추태와 폭력사태가 잇따라 일어나 금주령이라도 내려야 할 판이다. 4000만 원짜리 외유성 연찬회로 구설수에 올랐던 충남도 의회는 급기야는 의원들끼리 주먹다짐에 코피까지 터지는 추태를 벌여 지역민들의 혀를 차게 하고 있다.
역시 술이 화근이 됐다. 술에 취한 한 의원의 막말이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이 의원은 일차로 연찬장에 인사차 방문한 도청 간부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막말을 해댔고 이차로 이를 말리던 동료의원과 주먹다짐을 한 것이다. <'도의원 왜 이러나! 음주 폭행 파문' 디트뉴스 10월31일 보도>
■ 주사는 호기 아닌 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병'
이에 앞서서는 대전시 정무부시장과 시의회 의장단 간 설전과 고성으로 음식이 상에 엎질러지는 등의 술자리 행패 사건이 뒤늦게 알려져 역시 혀를 차게 하고 있다. <'김 부시장과 의장단, 무슨 일이?' 디트뉴스 10월30일 보도>
언론 보도를 보면 술을 마시고 벌인 행태는 이들이 과연 도의원이고 부시장이 맞는지 귀를 의심케 한다. 속옷 바람으로 거리로 튀어나오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주사는 습관이고 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병'이다.
우리사회가 유난히 술에 관대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하면 성폭력범이나 강력범도 범행 당시 술에 취했으면 심신미약으로 재판에서 정상이 참작될까. 오히려 가중 처벌해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특히 남자가 술을 잘 못 마시면 '빙충맞다'고 치부하기까지 한다. 반면 취중에 벌인 추태나 실수는 웬만하면 "술 마시고 그럴 수도 있지"라며 면죄부를 주기 십상이다.
술 잘 마시는 것이 왜 자랑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술이 세다는 것을 무슨 남자다움이나 벼슬처럼 달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자기 절제가 누구보다 필요한 공직사회에서조차 폭탄주 수십 잔 말았다는 것을 무용담으로 여기는 이들도 간혹 있으니 말이다.
■ 공직자의 폭음. 주사, 정책판단 그르칠 수 있어
하지만 술 앞에 장사 없다고 아무리 먹는 음식이라지만 도를 넘으면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다. 지속적이고 지속적인 과도한 음주는 뇌세포에 손상을 입혀 알코올성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소주 한 병 반 정도를 마신 28세 젊은이의 뇌는 60대였다는 충격적인 보도도 있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야 딸린 식구들만 고생하면 되지만 중요한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 공직자들에게 과도한 음주와 폭음은 결정적 결격 사유가 될 수 있다. 뇌세포 손상으로 인한 정확한 판단, 통제력 상실로 정책적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연말이다. 공직사회의 폭탄주 마는 소리에 시민들이 화들짝 놀랄 일이 생길까 겁난다. 오죽하면 먹는 음식인데 '술 먹은 개'라는 표현이 나왔을까. 부디 시민 세금으로 술 마시고 비틀거리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