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매장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 ‘해미순교자국제성지’
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2〉
서산 해미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충남 서해안 연안 해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였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조선시대 초에는 충청병영과 충청수영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충청병영은 청주로, 충청수영은 보령으로 이전했다. 이렇듯 해미 현감은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해미 관아는 지역 방위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으나,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시대에는 내포 지역의 천주교도를 색출해 처형하는 순교지로 악명이 높았다. 1790년 신해박해로부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의 여파가 사라진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의 잔혹한 박해는 한 번도 해미 진영을 비껴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는 전국의 순교지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다.
그래서 해미에 있는 해미읍성은 원형이 잘 보존된 평성(平城)이자 천주교 순교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에 완성된 해미읍성은 낙안읍성(전남 순천), 고창읍성(전북 고창)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1579년(선조 12) 10개월간 이곳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높이 5m, 둘레 1.8㎞의 성곽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돌에는 청주, 공주 등 고을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고을별로 구간을 나눠 맡아 쌓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는 ‘공사실명제’의 개념이다.
■ 이름도 남기지 못한 천주교 순교자들
해미읍성은 1866년 병인박해 때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박해를 당한 순교 성지이다. 해미읍성 남쪽의 진남루에서 동헌으로 가는 길목에는 옥사(감옥)가 있다. 당시 옥사는 충청도 각지에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로 가득했다고 한다. 옥사 앞에는 커다란 나무(호야나무)가 있는데, 이 나뭇가지 끝에 철사를 매달고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고문하고 처형했다고 한다. 신자가 많아 처형하기 힘들자 나중에는 해미읍성 밖 해미천 옆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천주교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이 인정한 ‘국제 성지’로 이름을 올렸다. 천주교성지를 크게 구분한다면 첫째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둘째로 주교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셋째로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로 나눌 수 있다.
교황청은 지난 2021년 해미순교성지를 ‘국제 성지’로 지정해 선포했다. 교황청은 지난 2020년 11월 29일 해미순교성지를 국제 성지로 승인한 뒤 선포 절차를 밟아왔다. 교황청은 서산시에 승인 교령도 전달했다. 한국에서 국제 성지로 선포된 곳은 지난 2018년 9월 서울대교구 순례길 이후 두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다. 국내 단일성지로는 ‘해미순교성지’가 유일하다. 해미순교성지는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있었던 곳은 아니지만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기록되지 않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1800~2100여 명으로 추정)이 1800년대 병인박해 등 천주교 박해로 처형당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천주교구가 조성 중인 해미순례길 역시 국제 성지로 포함된다.
기존의 전 세계 국제 성지로는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곳,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곳, 이 밖에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다.
해미순교성지의 ‘국제 성지’ 선포는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알린 영광스러운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서산시는 해미순교성지가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의미 있는 역사문화유산 공간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미순교성지가 국제성지로 지정된 것은 서산과 해미지역의 숭고한 역사성을 인정받은 것과도 같다는 평가가 따르는 이유다.
■ 해미국제순교성지, 생매장 순교지로 유명
서산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순교성지는 정사박해(1797) 때부터 병인박해(1866)때까지 무명 순교자 수 천명을 배출한 성지다. 조선 후기에는 1,5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무관이 해미현 현감을 겸해 통치했다.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권한을 가졌던 무관은 공명심에 신유(1801)박해·기해(1839)박해·병오(1846)박해·병인(1866)박해 등 조정의 공식적인 천주교 탄압 이외에도 천주교인들을 해미 진영(해미읍성)에 마구 잡아들여 수천 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병인박해 때에만 100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조정에 보고가 됐지만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김진후 비오,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등 3명만이 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라 ‘시복시성(諡福諡聖)’됐다.
해미순교성지는 생매장 순교지로도 유명하다. 사약, 몰매질, 교수형, 참수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했지만 천주교인이 너무 많아 처형하기 힘들자 해미천 옆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했다고 한다. 생매장될 때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은 사람들이 이곳을 ‘여숫골’이라 불렀다. 연못에 수장한 신자도 적지 않았는데, 그 연못을 ‘진둠벙’이라고 불렸다. ‘진’은 ‘죄인’이 줄어 변한 말이고 ‘둠벙’은 ‘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다.
클로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박해가 이뤄지는 동안 해미 진영에 있는 큰 감옥 2채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교인들이 항상 가득 차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감옥 터 호야나무 가지에는 당시 손발과 머리채가 묶인 순교자들을 매달았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천주교는 1784년(정조 8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건립하면서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됐지만 이후 종교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790년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도굴 사건 이후 정점으로 치달았다. 이때 내포 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는데, 그 숫자는 1000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해미순교성지는 1985년 4월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면서 같은 해 6월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했고, 2000년 8월 기공에 이어 3년 만인 2003년 6월 17일 완공했다. 이곳에 성지가 자리를 잡은 것은 농부들이 처형자의 유골을 캐내 냇물에 버렸다는 증언 등이 이어지며 생매장터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성당의 5대 신부인 바로 베드로 주임신부가 유해를 발굴해 기념관 등에 보존하고 있다.
지난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고, 해미 순교자인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의 3위가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해미순교성지에는 무덤을 형상화한 기념관과 성당이 있다. 박해 때 신자들을 묶어 물웅덩이에 빠뜨려 수장한 ‘진둠벙’, 생매장당한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 무명 순교자의 묘, 천주교도들을 던져 죽이던 ‘자리개돌’이 전시돼 처절했던 역사를 오늘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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