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동백림 사건과 옥중 작품들

2024-06-15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strong>황찬연<br></strong>DTC아트센터

1960년대 초반, 유럽전역에 자유의 물결이 들불처럼 번져 나아갈 때, 유럽발 민주화 열풍은 한국 군사정부에 큰 위협이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모략으로 1967년 ‘동백림(東伯林) 간첩단 사건’을 기획했다. 

그리고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지식인을 대거 간첩혐의에 연루시켰고, 이응노는 ‘해외 국위 선양 예술인 초청 전시’라는 명분에 속아서 귀국을 종용당한 후 어떠한 법률적 변호도 받지 못한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예술가로서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기막힐 일인데 게다가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는 암울한 수감생활은 이응노를 극단적 상황까지 내몰았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면서 이응노가 유명한 화가라는 점이 알려졌고 다행히 그림만은 그릴 수 있도록 간단한 그림도구가 제공될 수 있었다. 참담한 감옥 생활에서도 그의 예술 열정과 창의력은 식을 줄 몰랐고 다시금 빛을 발하는 기회를 만들어낸다. 

밥과 휴지를 섞은 종이죽으로 사람 형상을 빚어 <군상> 작품을 만들고, 간장과 김칫국물을 젓가락으로 찍어 풍경화를 그리고, 신문지 위에 문자추상을 새겨 넣었고, 사식으로 넣어준 나무 도시락 조각을 고추장으로 접착해서 콜라주 작품을 만들고, 낡아빠진 부채에 달걀 껍질을 붙여 황금부채를 만들고, 천둥 같은 울분을 날카로운 못 끝에 담아 단박에 식판을 뚫어내는 추상작품 등 작품을 통해 울분을 토해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화풍의 씨앗들을 만들어 내었다. 

아울러 이응노가 회고했듯,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영어의 몸이 됐던 그 시기에 그는 “교도소 안에서 수다한 굴곡진 삶을 겪어낸 민초들의 가슴시린 이야기를 들었고, 민중의 가난한 마음과 애달픈 삶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됐으며, 민족과 공동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자신의 작품에 담고자 했다”고 술회했다. 

이응노는 1969년 3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그해 5월에 프랑스로 떠나기 전 옥중에서 제작한 수많은 습작과 완성된 작품들 중 세심하게 골라 <옥중작품> 전시를 개최했는데, 이응노의 회고에 따르면 완성된 작품이 약 300여 점 정도 됐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현재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 너럭바위에 새겨진 <문자추상> 3점은 출소 후 3개월간 요양을 위해 잠시 여관에 머물면서 제작한 작품이 이응노를 기리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져 있다. 

산수(안양에서),

1969년 3월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출소를 앞두고 그린 <산수(안양에서)>는 하단에 (19)69년 3월 ‘안양교도소’에서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안양교도소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관악산 풍경으로, 한겨울이면 속살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깊은 산골들을 하얀 눈이 두텁게 내려앉아 환하게 빛나면서도 웅장한 그윽한 멋이 감도는 작품이다. 

문자추상은 실험적 성향이 돋보이는 1969년 작품으로, 이응노의 옥중 문자추상 습작품은 여러 점이 남겨져 있다. 신문지, 한지, 스케치북 등 다양한 재료 위에 연필, 볼펜, 간장, 잉크, 먹 등으로 제작했는데, 교도소 수감 중에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상당히 신중하게 제작한 흔적이 엿보인다. 엄밀하게 작품에 대한 구상을 80~90% 정도 완성한 후 재료 위에 실질적으로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필획이 엇갈리거나, 재수정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완성형에 가까운 습작품들이다. 더불어 문자추상, 조각, 오브제 꼴라주 등 실험적 작품 속에 담긴 예비적 징후들은 이응노의 1970년대 이후 작품들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