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수리치골 성모성지, 국내 최초의 ‘성모 신심 발상지’
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6〉
“공주에서 순교하신 분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수는 오직 천주님만이 아시느니라.”교회사가(敎會史家)였던 프랑스 선교사 달레가 기록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글이다. 이 가운데 국내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곳은 뜻밖에도 백제의 고도 충청도 공주다. ‘박해시대 교회의 심장’이라 불리는 ‘황새바위성지’가 바로 그곳이다. 황새바위성지에 이어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수리치골 성지(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를 꼽을 수 있다.
공주는 조선 시대 충청감영이 있던 곳으로 1801년 신유박해의 광풍은 공주에도 불어왔다. 삼남지방에서 끌려온 천주교도들이 공주감영으로 압송됐고,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처형된 장소가 바로 황새바위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에 따르면 예서 처형당한 순교자 가운데 공식적으로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내포 사도, 이존창’ 등 337위에 이른다. 국내 130여 곳에 달하는 천주교 성지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다. 그 다음으로는 병인박해 당시 기록상으로 모두 212명이 순교한 ‘홍주천주교순교성지’로 기록되지 않은 순교자등을 포함하면 1000여 명에 이르는 성지로,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등록이 추진되고 있다.
공주 신풍의 수리치골 성지는 조선 조정의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의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원이 있었던 곳으로, 선교사들의 근거지이자 충청도 지역의 선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공주에는 여러 곳에 천주교인들의 은거지가 있었는데, 차령산맥의 줄기인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한 곳인 데다, 터도 넓어 많은 천주교인들이 은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수리치골,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 창설
공주 수리치골 성지는 박해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대에 신자(교우)들이 숨어 살던 곳으로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가 조직된 뜻깊고 의미 있는 장소이다. 중국에서 사제로 서품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1845년 페레 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페레 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수리치골로 피신했으며, ‘성모성심회’를 조직해 신앙 활동을 이어갔다. 이곳은 ‘수리치’라는 취나물이 많이 나는 골짜기라서 ‘수리치골’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수리취는 취나물 가운데 잎이 가장 커서 붙여진 이름으로 ‘수릿날(단오)’에 떡을 만드는 취나물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알려지고 있다. 잎이 넓고 뒷면이 하얀색인 이 취나물은 반찬 용도로는 쓰지 않고 뜯어말렸다가 떡을 만드는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시기,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곳에 교우촌이 있었는데, 수리치골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넓어서 많은 교우가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경기 안성 미리내 성지에 있던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가 지난 2012년 수리치골 성지로 옮겨와 이곳을 관리하고 있으며, 신앙인들을 위해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아무튼 수리치골이 특별한 의의를 갖는 것은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때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라는 신심 단체가 창설돼 공주지역의 성모, 신심,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는 본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이다.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첫째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둘째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때인 1846년 11월 2일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에 의해 공주(公州)의 수리치골에 처음으로 조직됐다. 이후 널리 보급돼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당시 성모성심회의 창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국내 최초 공식적인 ‘성모 신심 발상지’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당시 한국 성모성심회 창설 당시에는 회합 장소마저 없어서 외따로 떨어진 한 교우의 가정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윗글에서처럼 수리치골은 당시 기존의 교우촌이 아니라 한 교우의 집에서의 활동으로 교우촌이 형성됐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은 물론이다.
당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다블뤼 신부의 편지에서는 성모성심회가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는 감동을 “주일날에 성모성심회의 교우들이 조선말로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고 상쾌해,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 나라 말로 성모를 찬미하고 죄인을 회두케 하시는 은혜를 갈구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인자하신 성모 마리아여, 많은 지방에 허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과 같이 우리 지방에도 베풀어 주실 지어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해 1841년 8월 22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해 서울의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님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잡지 등에 쓴 글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고 했으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성모 마리아 신심 단체가 수리치골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순례지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성지로 알려지고 있다. 이 수리치골 교우촌과 성모 성지가 확인돼 개발되기까지는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와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를 설립한 정행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의 특별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차례 답사를 통해 위치를 확인한 정 신부는 1986년부터 인근 부지를 매입해 성직자들을 위한 성모성심 봉쇄수도원을 1990년에 완공하고 천주성삼상을 제막했다. 1993년에는 ‘성모 칠고상’을 제작해 설치하기도 했다. 1997년 봉쇄수도원이 다른 곳으로 옮긴 이후 현재 이곳에는 2012년 이후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에 있던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총원이 들어와 한국교회 성모 성심 신심의 뿌리를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교구에서는 2017년 둘레길 주차장, 휴게소 건축했고, 2018년 12월 31일 성체조배실을 건립해 대전교구장 유흥식(라자로) 주교 주례 축복식 미사 거행했다. 2019년에는 성모 성심의 집, 성당, 강의실. 회의실 등 부대시설을 확충했다. 성지 끝자락의 게세마니 동산의 예수상과 잠자는 세 제자 등의 조각상도 세워져 있다. 수리치골 성지는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가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던 은신처이며, 국내 최초의 공식적인 ‘성모 신심 발상지’다.
공주의 천주교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조선 후기 충청도 지방 천주교도 300여 명이 순교했던 곳이다. 그래서 공주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이었던 중동성당에서 충청감영터와 교동성당을 거쳐 황새바위성지, 수리치골 성모 성지에 이르는 천주교 순례길도 조성돼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인 수리치골 성모 성지는 19세기 중반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으로, 박해와 고난의 역사를 증명하듯 언제나 고요하고 적막하다. 하지만 풍광은 신자가 아닌 일반 여행자들마저 매료시킬 만큼 특별하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 숨겨지듯 세워진 성당과 수녀원 건물은 마치 중세 유럽의 수도원 분위기를 연상시킬 만큼 경건하면서도 고고한 위용을 갖췄다. 넓게 조성된 성모 광장에 들어서면 그 옛날 역사의 시간으로 이끌리지만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예수의 고난 과정을 형상화한, 1터에서 14터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은 순례자 누구에게나 무한한 성찰과 가르침을 전해주는 이곳은 꼭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치유와 성찰의 공간으로 여기며 둘러볼 만하다. 성지 주변의 순례길과 등산로는 차분히 명상과 산책을 할 수 있는 최상의 힐링 공간으로 꼽히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