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금티 전투,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치열했던 전장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10〉

2024-08-03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130년

공주성 공격, 이인 전투에서 시작 대교·효포·능치 이어 우금티 전투로 
우금티 동학혁명 위령탑, 동학농민군 순국정신 비문 뒤틀려 본질 폄훼 
군사쿠데타 일으킨 ‘독재자의 이름, 5·16, 10월 유신’등 글자를 쪼아내
 송장배미,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의 송장이 논배미에 가득 쌓여 있었다’

 

2024년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의 해이다. 우리에게 동학농민혁명은 처음에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얼마가 지나서는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비로소 100주년이 되어서야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한 이름이다. 올바른 이름 하나를 찾는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정말로 그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문득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홍주(洪州)’라는 본래의 고유지명을 찾는 일에 10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어도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홍성의 ‘홍주지명되찾기’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아직도 하세월 표류 중인 ‘홍주지명되찾기’를 이곳 ‘공주’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웬일일까.

역사는 우리의 삶 자체이고 기록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역사가의 시선과 기록은 대체로 왕조 교체나 전쟁, 권력 다툼이나 위정자의 행적 등에 잇닿았다는 것이다. 이를 주류로 인식하며 역사 발전의 증거라고 강제해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름 없이 스러져간 다수 민중의 손으로 이끌어간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여러 이유로 기록되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 민중의 희생으로 역사 발전과 인본주의, 평등평화주의가 싹터 왔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의 역사이며 기록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인권이 신장했고 여성이 참정권을 쟁취했으며, 공정한 재판이 가능한 체제가 성립되면서 권력의 폭압에 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됐다. 이러한 바탕에는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민중의 저항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위정자든 자신이 쥔 권력을 순순히 내어주지는 않기 때문에 이렇듯 역사는 민중의 가슴에 자리한 셀 수 없는 무덤에 빚을 지며 세월을 더해왔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우금티에서의 희생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식하건 아니건 간에 변치 않는 역사가 됐고, 후세의 사가들은 이것을 기록할 것이다.
 

작은

■ 우금티 전투 대패, 동학농민군 해산
지금의 공주 우금티에서 1894년에 있었던 그 치열했던 동학농민군의 전투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130년 전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목숨까지 버려가며 만들고자 했던 평등한 세상이 아직도 우금티 고갯마루에는 그대로 묻혀 있다. 이를 대변하듯 고개 안쪽에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다. 1973년 11월 11일에 세워진 ‘동학혁명 위령탑’ 옆으로 난 길로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우금티다. 이곳의 ‘동학혁명 위령탑’의 비문을 보면 뒤틀리고 기가 막힌 가슴이 뻥 뚫리듯 지금은 2006년에 완공된 우금티 터널이 시원하게 뚫렸고, 위쪽에는 확 트인 언덕으로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우금티의 ‘동학혁명 위령탑’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이선근 박사가 글을 썼고, 제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했다. 탑의 비문에는 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군의 순국정신에서 이뤄졌다고 적고 있어 본질을 폄훼하고 있다. 

‘…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

하지만 오늘을 사는 현명한 민중들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의 이름과 5·16혁명, 10월 유신’이라는 글자를 쪼아내 훼손된 채 우뚝 서 있다.

우금티는 ‘소 우(牛)자에 금할 금(禁)’이 더해진 이름을 가진 고개로, ‘소를 금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옛날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해가 저문 뒤에는 소를 몰고 고개를 넘어가는 것을 금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우금티가 왜 동학농민군의 가장 치열했던 최후의 전투지가 됐는가.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해 전주로 넘어왔다가 관군과 화약을 맺고 일단락되는가 싶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일본군과 대항하기 위해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들은 서울 진입을 목표로 세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 중요한 거점이었던 공주를 먼저 장악해야 했던 것이다. 공주로 들어가는 우금티를 넘는 일은 그래서 동학농민군들에게는 이 모든 거사의 시작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금티 전투에서 대패로 패색이 짙어진 동학농민군을 전봉준은 해산했고, 결국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돼 처형되기에 이른다.
 

2006년에

■ 송장배미, 동학농민군 주검 한곳에 매장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 전투에서 시작돼 24일 대교 전투, 25일 효포·능치 전투, 그리고 최후의 항전인 11월 9일의 우금티 전투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성패가 달린 공주 공방전에서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맞서는 관군과 일본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끝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차 기병으로 모아진 거대한 동학농민군의 힘이 공주성을 에워싸고 폭발했으나, 수없이 많은 동학농민군을 공주 전선에 묻어버린 채 호남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남쪽으로 퇴각한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힘을 모아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반격전을 펼쳤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충남 남부와 내포 지역의 동학농민군 역시 공주를 향한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했으나 11월부터 본격화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점차 사그라졌다.

우금티 전투의 아픔은 지금도 공주의 곳곳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공주 금성여고와 문예회관 사잇길로 내려와 공주의료원 길 건너편으로 만나게 되는 ‘송장배미’라고 새겨진 표지석 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 그곳은 지금처럼 연꽃들이 가득한 못으로, 한때는 ‘용못’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는 이 연못이 송장배미로 불리게 된 것은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의 송장이 논배미에 가득 쌓여 있어서였다’고 전해진다. 너무나 참혹했던 송장배미는 한동안 묵히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종주 모퉁이 가서 송장배미나 지어 먹어라”는 땅 없는 가난한 농부를 놀리는 말이 한참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종주’는 송장배미에서 고마나루(곰나루)로 이어지는 들판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봉황산 뒤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죽어간 동학농민군의 주검을 한곳에 모아 매장한 장소인 송장배미는 주봉 자락이 곰나루로 달리다가 멈춰선 곳이다.

이 근처에 살다가 작고한 이상필 농민은 칠월칠석날이면 이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한 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주변에서 무엇 때문에 논에다 제사를 올리느냐고 하면 “뱀이 나와서 지낸다”고 둘러댔다고 전해진다. 또 송장배미 위에 있는 하고개에서의 동학농민군 전투에 대해 공주 봉황동에 살았던 김상만 옹은 생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증언하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 하고개에 놀러갔는데, 사람의 무릎 뼈와 턱뼈들을 바지게로 날라 부근 길가의 고랑에 파묻고 있었지. 그 뼈는 사람들이 집을 지으려고 땅을 고르다가 나온 뼈야. 그래서 그 뼈가 나온 이야기를 할아버지께 했더니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홍주의 동학농민군들이 장날에 장꾼으로 가장해서 하고개로 들어왔는데, 그들이 모조리 잡혀 처형당해서 그곳에 묻혀서 그런거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송장배미는 그래서 우금티 동학농민군들의 아픔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금티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아픈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공주는 그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여러 역사적 사건들의 주 무대가 됐다. 금강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고마나루는 그래서 공주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 여기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다. 즉 ‘곰나루’의 한자명으로 우리가 백제하면 익숙하게 떠올리던 수도 ‘웅진(熊津)’이 바로 그곳이다. 475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두 번째 수도가 됐던 곳이다. 538년 성왕이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이곳은 삼국시대 마한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곳이었다. 우금티가 공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것처럼, 고마나루는 백제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그래서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러 들어왔을 때 주둔지였고,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했다.

1894년의 우금티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과 교전한 공주전투의 마지막 전투다. 공주전투는 1892년 공주에서 시작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 힘입은 바 컸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 시작된 곳은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였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