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동학농민혁명 중심지, 보령현과 남포현·충청수영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13〉

2024-08-31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보령현·남포현 현감 파견돼 통치, 지역 방어와 행정의 중심지·읍성 축조
오천에 ‘충청도수군절도사영’ 설치, 장항~평택 해안방어 수군사령부 역할
보령지역 동학, 남포에서 추용성과 김기창·보령 접주 이원백이 세력 형성
오천 수영에서 무기 탈취한 동학농민군, 홍주로 진격하다 광천전투 패배

 

조선 시대 보령의 북부지역은 보령현(保寧縣)이 현재의 주포면 보령리에 설치돼 현감이 파견돼 통치했다. 남부지역은 남포현(藍浦縣)이 설치됐는데, 현(縣)의 중심지가 웅천에 있던 것을 세종 때 현재의 남포면 읍내리로 옮겼다. 여기도 중앙에서 현감이 파견돼 통치가 이뤄졌다.

한편 보령현과 남포현은 세종 때 이 지역의 방어와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기 위해 보령읍성과 남포읍성을 축조했다. 또한 오천에는 ‘충청도수군절도사영(수영)’이 설치돼 장항에서 평택까지의 충청도 해안방어의 수군사령부 역할을 했고, 여기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수많은 군선이 있었으며 거대한 성벽도 수축했다. 이 수군절도사영 휘하에는 충청도 각 해안에 5개의 휘하 부대가 설치됐는데, 휘하부대들과 함께하는 수군 종합 훈련 시의 오천 앞바다는 장관을 이뤘고 군사도시의 위용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충청수영 휘하의 5개 수군기지 중의 하나가 웅천 황교리에 마량진(현재 구진으로 불림)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돼 보령 지역의 해상 방비를 더욱 철저히 했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웅천의 서부지역에 20여 리에 걸치는 목장성(牧場城)을 만들어 나라에서 쓰는 군용의 말(馬)과 소(牛)를 길러 해안의 수송로를 통해 전국에 보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로써 보령현과 남포현, 충청수영이 보령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지 역할을 했다.

충남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내포’라고 불리는 서남부 지역, 천안을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 보령을 비롯해 서천, 부여, 청양 일대를 아우르는 서남부 지역, 논산과 금산을 포괄하는 동남부 지역, 우금티 전투가 일어난 공주지역으로 나뉘어 활동상이 현재는 밝혀지고 있다. 

보령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보령 지역의 보령현과 남포현, 충청수영 지역에서 동학도와 동학농민군들이 합세해 일으켰다.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보령 지역에서 동학은 교단의 포교를 통해 세력을 형성했다. 남포에서는 추용성(秋鏞聲)과 김기창(金基昌)이 세력을 형성했는데, 추용성은 1893년 보은집회 당시 남포의 접주(接主; 동학에서 포교를 위해 설치한 각 지방 접소의 우두머리)로 활약하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 1차 봉기가 마무리된 1894년 8월 6일 선무사가 홍주(洪州)에 내려와 충청도 지역의 접주들을 모아 놓고 동학농민혁명에 호응하지 말도록 타일렀던 것으로 볼 때, 조정에서는 호서지역의 동학농민군 봉기를 미리 막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보령의 접주인 이원백과 남포의 접주인 추용성의 소재 파악이 이뤄져 있던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포읍성

 

■ 홍주 진격하던 농민군 광천 전투 패배
보령 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령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태안, 서산 등 내포 핵심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에 대해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 보령을 기반으로 활동을 전개한 동학농민군은 이원백이 대표적이다. 이원백은 접주로서 보령 지역 동학농민군을 이끌었으며, 홍주성 전투에 참여한 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김우경, 김사종도 보령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남포 지역의 대표적인 동학농민군은 접주인 추용성이다. 추용성은 접주로서 보은집회에 참여했으며, 남포 지역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남포현 도화담에 근거를 두고 있던 추용성은 남포뿐만 아니라 호서 일대에 우두머리로 알려져 있다. 추용성은 관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하고 인명을 해치고 전곡을 빼앗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남포 지역에 유회소(儒會所)가 설치돼 활동하고 있었으나, 추용성 등 남포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 유회군의 활동이 매우 위축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여러 곳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마침내 전주를 점령했다. 외세를 몰아내고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 군이 출동하자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정부와 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했다. 이것이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였다. 하지만 약속 이행이 지연되고 일본군의 침략적 행동이 강화되자, 척왜를 내세우고 남접과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다시 궐기해 일본군과 항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봉준 등의 지도자들이 체포돼 동학농민혁은 민중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이다.

동학은 충청도 지역에서도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1차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충남지방에서 회덕, 진잠, 공주, 은진, 한산, 비인, 연산, 서천, 서산, 홍주, 당진, 면천, 전의, 연기, 정산, 보령 지역 등에서 호응을 했다. 동학농민군이 제2차로 봉기하면서 전라도 지역의 남접군이 북상해 오자 충청도 지역의 북접이 호응하면서 충청도 각 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제2차 동학농민군이 충청도 지역에 진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관군과 함께 일본군이 증파됐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에 있어 보령 지역은 조직적인 동학농민군의 활동이나 관군의 조직적 진압에 관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고 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보령 지역에도 동학농민혁명의 여파가 크게 미쳤음을 알 수가 있다.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 때는 보령 지역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없어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제2차 봉기 때인 1894년 10월 8일(음) 오천의 수영에서 무기를 탈취한 한 무리의 동학농민군이 홍주(洪州)로 진격하다가 광천(廣川)에서 호연초토사 겸 홍주목사 이승우의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했다. 이때 오천 수영에서 탈취됐던 대포 30여 문이 다시 관군에 노획돼 홍주성(洪州城)의 방어에 보충됐다. 당시 충청도 서북부지역에는 훗날 천도교 제4대 교주가 된 박인호(朴仁浩)에 의해 포교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남포에서는 추용성과 김기창(金起昌)이 박인호에 의해 포덕 입도케 됐다. 추용성은 보은집회 당시 남포의 접주로 활약하며 참여했다. 이때 보은집회는 전국의 접주가 참여해 최시형을 중심으로 집회를 열고 있었고, 전라도 고부 접주는 전봉준이었다. 따라서 추용성과 김기창에 의해 보령의 남포 지역에 동학이 많이 포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령


■ 농민군 격퇴, 유회소 설치 보부상과 진압
1894년 8월 6일(음) 선무사(宣撫使)가 홍주(洪州)에 내려와 경내의 접주들을 모아 효유(曉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정에서는 미리 호서 지역의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미리 예방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이때 보령 접주 이원백과 남포 접주 추용성도 참여했다(初六日宣撫使到州招集境內所謂接主者宣讀者綸音而曉諭之是時有名之魁不可盡記而最其尤洪州金永弼丁大哲李漢奎鄭元甲羅成蕾德山李春實禮山朴德七朴道一大興兪致敎保寧李源百藍浦秋鏞成定山金基昌沔川李昌求也 -洪陽紀事)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남포현에서는 추용성(秋鏞聲; 吳知泳 東學史)과 김우경(金禹卿;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이 기병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활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보령현 지역에서는 이원백(李源百; 洪陽紀事)이 접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1일(음) 남포 도화담에서 접주 추성재·이우성·이성구, 접주 추용성 등이 관군에 체포됐다. 추용성은 이속(吏屬; 조선 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속해 있던 하급 관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홍주(洪州) 등 충남 서북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뒤인 1894년 12월 이후에도 보령과 남포의 동학도들은 남접의 영향을 받은 서천과 한산 등의 동학농민군과 연계해 홍주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일본군과 관군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해 한산과 서천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지휘하는 관군이 주둔했고, 그들과 산발적인 전투를 전개하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방의 사족들은 동학농민군을 격퇴하기 위해 유회소(儒會所)를 설치해 보부상군 등과 함께 진압에 나서게 되는데, 보령과 남포에서도 11월에 유회소가 설치돼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나섰다. 이때 유회소 조직을 허락받은 곳은 보령 오삼전면 은현(保寧吳三田面隱峴)과 남포 삼계 지곡(藍浦三溪池谷)의 ‘조승지가(趙承旨家)’였다. 조승지가는 미산면 삼계리의 양주조씨 집안으로 추정되는데, 삼계리에는 양주조씨가 입향해 이 당시 조병덕의 손자들이 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하고 있었다. 또한 갑오군공록에 오른 사람은 남포 유학자 이종륜(李鍾崙)이었다. 갑오군공록에 의하면 그는 남포 유학으로 재물을 내고 사람들을 모아서 동학농민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藍浦幼學李鍾崙捐財募衆擊退劇匪)고 했다. 이종륜은 남포현에 거주하던 성주이씨의 인물로 그의 형 이종국(李鍾國)도 홍주 관군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충청 서북부지역 관군의 최대 참패로 끝난 예산 신례원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기도 했다. 또 갑오군공록에 오른 사람은 남포 유학자 임의준(任義準)이었는데, 갑오군공록에 의하면 그는 유회군 조직에 앞장섰으며, 동학농민군을 소탕했다(藍浦幼學任義準先倡儒會巡勦匪黨)고 기록하고 있다. 임의준은 남포현에 거주하는 풍천임씨의 인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남포 현감 민경훈(閔景勳)과 약속하고, 임상호(任尙鎬)·임학준(任學準)·김성희(金成喜)·채성구(蔡聖龜)·최돈욱(崔敦郁)·이병제(李秉濟)·조정순(趙靖淳) 등의 지역 유림과 함께 거의해 홍주성에 가서 동학농민군을 소탕하는 데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또한 남포 유학자 채상오(蔡相五)도 비인 판교에서 동학농민군을 여러 명 체포한 공로로 갑오군공록에 올랐다(藍浦幼學蔡相五庇仁板橋捉匪數).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포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사람은 김홍제(金洪濟, 前僉使, 3품)이며, 보령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박홍양(朴鴻陽, 前 定山郡守, 3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듯 사회체제를 개혁하려고 나섰던 동학농민군은 일본세력에 직면해서 분연히 맞서 싸우다가 관군과 유학자, 의병 등에 의해 동학농민혁명 봉기는 결과적으로 좌절로 끝이 났다.

보령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