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은 생의 이야기들

2024-09-12     김혜진 <홍성녹색당>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열다섯 때부터 천천히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인이 된 조승리의 에세이다. 아마도 장애를 극복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사람의 눈물겨운 성공 스토리가 들어 있겠지, 하며 책을 펼쳤다. 스물네 개의 짤막한 장들은 쉽게 읽혔다. 책 속엔 그녀가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했던 엄마, 어릴 적 함께 놀던 동네 오빠, 단짝 친구 ‘돼지코’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이 이따금, 그를 어린 시절로 소환해 갈 때면 독자들도 함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산 너머 약수로 눈을 씻으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오래되어 썩은 듯한’ 이야기를 믿고 정체 모를 흙탕물로 눈을 씻게 하거나, 산속 절로 끌고 가 대못 같은 침을 머리에 맞게 했던 그의 엄마는 장애인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지 않은 이유를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네 개들이 전부 짖어대도록 밤늦은 뒷마당에서 폭죽을 쏘고 장난기 있는 웃음을 짓거나, 음주단속 경찰을 놀리려고 일부러 곡예 운전을 하던 엄마와 차를 세우고 함께 담배를 피운 기억도 있다. 당신 죽을 때 같이 죽자던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 없어도 잘 살 거라던 딸은 그 호언장담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슈퍼를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 3km는 나가야 했던 시골 마을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치 눈으로 보듯 생생하다. 눈이 흐려질 무렵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여주던 친구,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동네 할머니, 고향을 지키겠다고 빚과 함께 농토를 물려받아 결국은 힘든 생을 살다 죽은 친척 오빠, 노름하다 쫒겨 온 엄마를 따라 부산에서 전학왔다가 어느 날 다시 가버린 그리운 친구의 이야기 등. 그 속엔 붉게 익은 산딸기 군락지가 있고 익지 않아 온 몸이 뱅뱅 꼬이도록 신 포도나무 울타리도 있다. 매 순간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충실하고 당당하게 살아온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또 강직하다. 푸른 포도만큼 시고 떫은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경험이 된다. 

선택지가 달리 없던 그는 마사지 기술을 배워 안마사로 일하며 많은 손님을 만난다.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이젠 고객들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직업에 보람을 느낀다. 책에는 그가 일하고 생활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사납고 까다로워 불편한 손님이었지만 알고 보니 마사지숍에서 큰 위안을 얻어간다는 ‘사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울증에 걸린 할머니 손님, 휠체어를 타면서도 수영으로 한강을 횡단한 강인한 ‘숙희 씨’, 스무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장애인학교 동급생 조선족 언니, 활동지원사 수미씨……. 이 이야기들은 또한 독자를 다양한 삶의 장면으로 데려다 준다. 

생계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공헌의 큰 뜻으로 장애인 활동 지원을 하는 수미 씨를 그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처지가 다르기에 때론 수미 씨는 답답하거나, 무례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원망했지만 한편으론 그리운 엄마처럼, 사람과의 관계나 각각의 삶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적이다. 책을 덮고 나면 시작 장애인의 이야기라는 느낌보다는 충실하게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이 보인다. 그는 주변 이들에게 과하게 개입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깊은 불행을 껴안고도 이를 달래는 법을 안다. 깊은 공감과 연민으로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의 단단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기가 된다.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동글게 말았다. 스피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마모된 몽돌이다. 까맣고 동그란 몽돌. 누구나 불행을 견디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불행을 참아내고 있다. 앞뒤로 흔들던 몸을 좌우로 흔든다. 몽돌은 수심 깊이 가라앉는다. 나는 갑자기 행복해졌다. 정지된 도시 속 건물의 소음이 내 불행을 달래주는 밤이었다.(159쪽)
 

김혜진<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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