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선택

2024-10-10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영화 잡지 《키노》의 주성철 기자는 주인공 모두 “고아이자 누군가의 집에 하녀로, 혹은 하녀처럼 들어가 일한다”는 공통점을 들며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10), <아가씨>(2016), <헤어질 결심>(2022)을 두고 “하녀 3부작”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모두 ‘위장(僞裝)’과 관련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미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최신작 <동조자>(2024)는 그 ‘거짓 꾸밈’을 거의 끝까지 밀어붙인다. 베트남 이민자 출신인 주인공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베트남 대위지만, 알고 보면 CIA 비밀 요원이고, 마지막 꺼풀을 벗기면 북베트남 고정간첩이다. 그는 ‘자신을 거짓으로 감추고 주변 사람들을 속여야 하는 시쳇말로 ‘두더지’이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한마디로 그는 주변인이다. 그는 베트남에서도, 미국에서도, 심지어 북베트남에서도 주변인이다.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동조자>는 작가 응우옌의 동명 소설 《동조자》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2016년 미국 최고의 저술상인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베트남에서는 금서 목록에 올라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이 작품이 공산당, 특히 호치민을 모독한다고 생각해서 금서로 지정했다. 작품 제목 ‘동조자’는 영어로 ‘The Sympathizer’, 즉 ‘공감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념상 좌든 우든 어느 쪽이든 쉽게 공감한다. ‘나’의 운명은 이미 아홉 살 이전에 정해졌다. 인종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양쪽 모두의 의견에 쉽게 동조 또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소설 《동조자》를 읽고 드라마 <동조자>를 보면서 문득 예전에 읽었던 이창래의 《제스처 라이프》(1999)가 생각났다. 《제스처 라이프》의 주인공 프랭클린 하타는 미국 뉴욕시 교외에 있는 베들리런이라는 백인 동네에 정착해 자신의 과거를 감춘 채 30년 동안 의료기 상점을 운영하다가 최근에 은퇴한 일본계 미국인이다. 하지만 원래 그는 한국인이었지만 일본인 부부에 의해 입양돼 일본인이 됐고,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미국인이 됐다. 그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타자’로 규정되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선택했고, 미국 주류문화에 동화해 일등 시민이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하타의 그런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 의사는 아니지만 ‘닥터’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인 지배 사회인 미국에서 그가 소유한 인기와 평판은 미국문화에 동화하려는 끝없는 ‘흉내 내기’에서 비롯됐다. 즉 그는 베들리런의 백인 주민 사회에 편입됐지만, 개별자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백인들이 그리고 백인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자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누려온 것들이 모두 마을 사람들의 너그러운 마음과 환대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미국 사회에 ‘동화(assimilation)’되려고 부단히 애쓴다. 그가 입양한 딸 서니는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제스처만을 취하는 그를 “착한 찰리”라고 비판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을 베풀며 ‘일등 시민’이 됐지만, 자신이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여전히 소외된 이방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과의 진정한 소통에 실패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하타는 새롭게 편입한 사회에서 살아남고 인정받기 위해 단순히 동화 대상을 익히고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방 대상처럼 ‘행세하기’라는 속임을 강하게 배가시킴으로써 동화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패싱과 동화라는 속임수를 통해 지속되는 하타의 삶은 물질적으로는 성공적일지 모르지만 정서적으로는 결핍돼 있고 무력하다. 《동조자》의 주인공 ‘나’의 삶 또한 하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백인들은 동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오랫동안 자신들이 가져온 편견 속에서 신비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인의 우월함과 동양의 신비화를 강화하는 서양의 자기 이미지 강화 책략이라고 비판한다. 오리엔탈리즘은 권력의 불균등한 교환 관계 속에서 확대·재생산된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세 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 첫째, 자신이 미국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열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둘째, 미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미국인으로 동화되는 것이다. 《제스처 라이프》의 하타와 <동조자>의 ‘나’는 아마도 마지막에 가까운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을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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