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만·삽교천 물줄기가 만나는 곳 ‘원머리·황무실 성지’

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11〉

2024-10-12     취재단=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학생기자단

원머리 성지는 당진 신평면 한정리 231-1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시골 길가에 있다.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원머리는 이존창이 내포 지역에 복음을 전한 1785년부터 조선 교회의 시작과 함께 교우촌이 형성된 아주 오래된 곳이라고 한다. 본래 ‘원머리’는 갯벌을 개간해 논으로 사용하려고 둑을 쌓은 ‘언(堰) 첫머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의 둑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堰頭里)’가 ‘언머리’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원머리’로 변형된 말이라고 한다. 이름처럼 신자들은 염판, 어업, 농업에 종사하며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다. 

원머리 지역은 아산만의 물과 삽교천 하부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다. 당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섬의 모양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따라서 천혜의 요지인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많은 교우들은 주로 염판(불로 바닷물을 지펴서 증유해 소금으로 만드는 작업)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소금과 옹기 행상은 특성상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기에 박해와 포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누구와도 만날 수 있기에 신앙을 알리고 전파하는데 적합한 전교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1785년 무렵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주변 내포 지역과 함께 신앙이 전해지고 1790년대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됐음을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朴宗岳)이 남긴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기록으로 볼 때 원머리 교우촌은 원머리 공소로 발전돼 이웃의 새터 공소와 함께 아주 열심히 하고 우수한 공소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뒷날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나, 그 뒤를 이은 홍병철(洪秉喆, 1874~1913, 루카) 신부(1905년 재임), 크렘프(Krempff, 慶元善, 1882~1946, 핸리) 신부(1913년 재임)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당시 공소 신자들은 일찍부터 고아를 신자 집에서 기르는 성영회(聖嬰會) 사업에도 동참했고, 공소전(公所錢)으로 교리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교리 학교는 처음부터 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면서 점차 활성화됐다. 이후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대전교구 박재만 신부를 비롯해 최효인, 최상순 신부 등 많은 신부들이 이곳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원머리, 박 마르코·박 마티아 치명자 모셔
1800년대 박해 시기에는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지방과 산간으로 숨어들어 가 살았는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신앙이 퍼져나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원머리 지역 또한 다른 교우촌과 같이 박해를 안전하게 피할 수 없게 되면서 끝내 병인박해(1866) 이후 무진박해(1868)까지 20여 명의 치명자가 나온 곳이다. 이들의 순교 형식을 보면 교수형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생매장이 6명이며, 순교 형태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4명 등이다. 

순교 장소로는 홍주가 16명, 해미가 2명, 수원 감영이 2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교 연도별 치명자의 명단을 보면, 1866년에 6명(한 마티아, 양정수, 홍 베드로닐라, 양명삼,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 1867년에 5명(김 마리아, 원씨, 양 도미니코, 김자선의 모친, 송춘일)이 순교했다. 1868년 무진년에는 8명(박 요한, 문 마리아, 박 마르코, 박 미티아,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의 치명자와 연도 미상자 1명(양 아우구스티노)이 굳건한 용덕을 보이며 순교했다.
 

대부분 순교자의 묘는 박해 시기 때부터 눈을 피해 깊은 산속 외딴곳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어 분실되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머리 성지에는 현재 수원 감영에 끌려가 순교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의 치명자가 모셔져 있다. 특히 이들 순교자 묘는 조선 시대 무덤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 전통문화 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훗날 형의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코 형은 모친의 뜻에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동네 교우들과 잘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늘 마음속으로 꺼렸다.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돼 잡혀갈 때 그는 부모님께 하직하며 위로하기를 ‘거기 가서 죽으면 어찌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마는 주님의 명대로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 구원에 편한 일이니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의 사촌 형 박태진 마티아와 함께 수원으로 붙잡혀 끌려갔다. 관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사촌 형 박 마티아가 매를 못 이겨 배교했다. 이때 박 마르코는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어떻게 받으려 하느냐’고 하자 이에 박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15일 후에 같이 순교했다. 이때 박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외교인 서덕행이 모진 매를 맞아가며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로 운구해 가족에게 넘겼다. 이후 서덕행은 순교자 박 마르코의 매제가 됐고, 그가 죽은 후 그의 공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두 분 순교자 묘 옆에 안장했다.

1989년 4월 4일 순교자 묘는 모 본당인 ‘신평 성당’의 구내로 옮겨 모시며 현양비를 세웠다. 신평 성당은 지난 2000년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두 순교자의 묘를 재정비했고, 2009년 11월 3일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이곳 원머리 순교사적지 묘역으로 유해를 다시 이장했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했다. 다행히 그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빈 무덤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지난 2009년부터 한국교회에서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132위’의 시복 추진에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포함되고, 그리고 근·현대 ‘하느님의 종 80위’에 6·25 한국전쟁 때 순교한 유영근(세례자요한) 신부와 박영옥(안드레아) 부회장이 선정돼 현재 시복 추진 중이라고 한다. 묘역 앞 넓은 터에는 복원된 건물이 한 동 있고, 묘역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특이하게 펼쳐진 책 모양의 안내판이 있다. 묘역 앞에는 성모상이 묘역을 지키듯 서 있고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이것이 원머리 성지의 지금의 모습이다.
 

황무실

■ 황무실 성지, 첫 순교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황무실 성지는 당진 합덕읍 석우리 1013, 나지막한 구릉지대로 충청도 내포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직후 1785년 경부터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오래된 교우촌이다. 황무실 교우촌은 1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했으며 박해 중에 숨어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황무실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로 붕괴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믿음을 증거하며 목숨을 내놓았던 순교자들의 혼이 서려 있는 교우촌이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쓸쓸함도 더하고 있다. 황무실 출신의 첫 순교자로 기록된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1800년 1월 9일 해미에서 순교했고, 그 밖에도 많은 교우들이 홍주와 해미에서 순교했으며,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황무실은 당진시와 예산군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얕은 구릉 지대에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 신앙공동체가 존속했던 곳이다. 또한 신리 교우촌과 더불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한 내포교회의 중심지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철저히 교우촌이 파괴되고, 이웃한 면천 출신과 합쳐 7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서서히 역사 속에 묻혔다. 그러던 중 신합덕 성당 신자들이 황무실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소를 찾아 솔뫼 성지처럼 황무실을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해 자주 순례하며 선교 사제와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다. 1970년 4월 30일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 성당으로 이장하면서 황무실은 교우들의 관심에서 다시 멀어 지면서 돌보지 않는 순교사적지가 됐다.

황무실은 2014년 8월 16일 이곳 출신 이보현 프란치스코 순교자의 시복을 계기로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신합덕 본당은 해미에서 순교한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옛 황무실 교우촌 부지를 매입해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황무실 성지와 순교자 현양비 축복 미사를 봉헌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