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맹’을 위한 분류학-《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고
만약 우리 주변의 어떤 생물종 하나가 사라진다면 그 빈자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여전히 채집을 통해 먹거리를 확보하는 마을의 할머니들, 다른 생물종들과 협업하는 농민 정도만이 떠오른다. ‘보통’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더 이상 생명의 체계를 그릴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뒷산의 어떤 풀 하나 사라진다 한들 우리 중 다수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다.
이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분류학의 ‘발전’을 꼽는다. 저자 자신이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로서 나름의 용기 있는 고백을 한 셈이다. 저자는 수리분류학, 분자생물학 그리고 계통분류학으로 이어지는 분류학의 계보를 따라간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들이 어떻게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하루 150종 이상의 생물체가 멸종한다고 추정되는(유엔 세계생물다양성위원회, 2021) 현 상황에서 이 이론들은 아무런 실천력도 갖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 경고한다.
모든 문화권에는 그 지역에 맞는 토착의 분류학이 있다. 각 지역의 환경과 전통, 생활양식에 따라 생태계는 독특하게 이해돼 왔다. 18세기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한 린네 역시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다. 논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각이야말로 생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분류학이 과학의 변방으로 밀려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린네의 체계 혹은 토착적인 분류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생명의 체계를 읽을 수 없는 ‘생태맹’인 우리에게 이 과거의 전통은 훌륭한 안내자가 된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한때 나는 식물 이름을 알아가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끌어준 선생님이 계셨다. 대부분 마을 주변의 나무를 공부했다. 가끔은 선생님과 오서산처럼 멀진 않아도 조금은 동떨어진 곳으로 ‘식물상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알아내야 할 식물의 목록이 쌓이고 정교하진 않지만 애정을 담은 세밀화가 쌓였다. 이름을 붙이는 일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배경으로 물러나있던 흐릿한 풍경들이 점차 또렷해지며 ‘아하!’의 감각이 생겼다.
그러나 대상을 바라보는 데서 오던 단순한 기쁨은 시간이 지나며 집착적인 수집으로 성격이 바뀌어갔다. 그림을 그리며 나무를 관찰하던 시간은 사진 찍기로 대체되었다. 라틴어로 이뤄진 학명을 노트에 따라 쓰며 느끼던 순수한 기쁨은 한 효율적인 어플을 이용하며 잃어버렸다. 이제는 생물 사진을 찍어 어플에 등록하면 꽤 빠르고 정확한 동정(同定, 생물의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대상 생물의 분류군을 찾는 과정)이 가능했다.
국가생물종자원시스템 사이트로 연동돼 따로 학명을 알아보지 않아도 됐다. 이전에는 선생님을 따라 숲과 산에서, 마을 어귀에서 꽃의 암술이나 수술의 개수를 세느라 뒷목이 뻐근해 인내심이 닳는 기분이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편리했다. 우연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이 어플을 사용한 이후 식물에 이름 붙이는 활동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천천히 몰입하며 대상을 이해하던 시간이, ‘정답’을 맞추는 일로 돼버린 듯했다.
선생님은 내 동정에 때로 ‘확실하지 않은’ 이란 단서를 붙였다. 정답이 분명한 마을의 아주 흔한 식물일 경우에도 그랬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든 기관에 대해, 특히 꽃을 제대로 관찰하지 않았을 경우 언제나 답은 유보됐다.
화학적 방법을 적용해 분자구조를 밝히고, 계통을 추적해 우리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진화의 결과를 밝힐 때, 그렇게 구한 ‘정답’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물종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는 시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전문가의 영역으로 미뤄둔 생명에 대한 사유- 우리 스스로 ‘자연에 이름 붙이는 일’을 되찾는 일이 아닐까. 저자는 린네가 활동했던 18세기 당시, 생물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려는 작업은 소수 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적인 문화 풍조였다고 전하며 이렇게 쓴다.
“신기한 수집품 장식장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은 수많은 사람이 이해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든 아니든) 생물을 보면서 깊이 생각할 때, 그러니까 정말 제대로 바라볼 때는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몇몇 형태들은 더 닮아 보이고 또 어떤 형태들은 더 달라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떤 질서의 감각, 바로 자연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질서를 인지했을 때, 거기에는 어떤 성찰의 기쁨이, 경이로운 대상을 차분하고 깊이 이해했다는 만족스러운 마음이 따라온다.(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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