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梅軒)의 정신, “역사의 등불로 영원히 빛날 것”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92주기 추모제 열려
[홍주일보 예산=김영정 기자] 지난 1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에서 큰 위업을 이루고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한 지 92년이 되는 날로, 덕산면 시량리 소재 충의사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9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예산군이 주최하고 매헌사랑회(회장 조형석)가 주관한 이번 추모제는 최재구 예산군수, 장승관 예산군의회 의장, 방한일·주진하 충남도의회 의원, 김영진·이정순 예산군의원 등 내빈과 매헌 사랑회 회원, 지역주민 50여 명이 참석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순국에 대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추모했다.
추모제는 △개회 및 국민의례 △윤봉길 의사 약력 보고 △윤봉길 의사 어록 낭독 △추념사 △추모사 △추모 제례 △헌화의 순으로 진행됐고 추모 제례는 최재구 군수와 장순관 의장, 매헌 사랑회 조형석 회장이 전통 제례 의상을 갖춰 입고 각각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제례를 진행했다.
매헌 사랑회 조형석 회장은 추념사에서 “24년 전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윤봉길 의사 흉상을 제작했던 매헌 사랑회의 첫 마음은 이념을 떠난 의사에 대한 흠모였다”며 “의사께서 보여주셨던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 사심 없는 애국심이 우리를 꾸준하게 일깨우는 동력이었고 그 위대한 발자취는 아직도 커다란 울림이 돼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재구 예산군수는 추모사에서 “1932년 4월 29일 의사님의 의거는 침략에 대한 저항을 넘어 제국주의 수뇌부에 엄청난 타격을 준 쾌거”라며 “의사님의 희생과 헌신은 대한민국 역사에 빛나는 등불로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말하며 윤봉길 의사의 평안을 기원했다.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 마을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선인으로서 우리말도 마음대로 못 쓰고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많던 중 12살이던 1919년, 3·1운동을 보고 일본을 증오하게 돼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배우러 서당을 다녔다.
이후 월진회를 조직해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와 계몽 운동에 힘쓰다가 1930년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중국 청도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면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고 김구 선생과 만나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1932년 4월 26일 상해 의거 거사 준비를 마치고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했다. 3일 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 전승 기념식장에서 역사적인 의거를 거행,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데이지와,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했고 상해 총영사, 육군 중장 등 주변의 수십 명의 일본 주요 인사들과 일본군들이 폭탄의 파편으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거사 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일본 육군 헌병에 체포됐고, 5월 25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돼 불과 24세의 짧은 생을 뒤로하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했던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개석(蔣介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됐고,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관철시켜 결과적으로 대한의 독립을 이끌어낸 계기가 됐다.
사형집행 후 윤봉길 의사의 시신은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됐다가 14년이 지난 광복 직후 김구 선생의 지시로 유해를 찾아 현재는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모셔졌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를 실행하기 전 김구 선생과의 마지막 조찬자리에서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꿔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새로 산 회중시계를 김구 선생에게 주고 김구 선생의 낡은 회중시계로 바꿔 품에 넣고 의거에 임했으며 광복 후 김구 선생은 윤 의사 어머니를 찾아가 윤 의사와 바꾼 시계를 보여주며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전해진다. 이 시계는 현재 백범기념관에 전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