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쓰레기를 먹다

2025-01-23     윤찬솔 칼럼·독자위원

한 변이 7.5cm인 정육면체 나무 블록. 큐브처럼 27개의 정육면체로 분할되고 이 중 몇 개는 다시 삼각기둥으로 나뉜다. 아동교육으로 유명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프뢰벨이 발명한 장난감이다. 아이들은 책상을, 부엌을, 집을 끊임없이 짓고 짓는다. 그리고 무너뜨린다. 표면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서로 잘 미끄러지도록 설계된 블록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쉽게 무너진다. 무너져야 다른 모양으로 재조립될 수 있다. 놀이의 마무리는 언제나 정리. 큰 정육면체로 돌아온 블록에는 무엇으로든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에너지가 감돈다.

《분해의 철학》의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프뢰벨의 나무블럭에 담긴 교육원리를 ‘분해론’의 기본모델로 삼는다. 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되고, 부분 하나하나가 유일한 개체이며 그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분해를 반복한다는 것. 프뢰벨이 ‘전체’와 ‘통일’에 더 비중을 두었다면 저자는 붕괴, 파열, 분해에 집중한다. 심지어 생산보다 분해가 먼저이며, 살아감이라는 것 자체가 쌓는 것이 아니라 분해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 말한다. 매일 다른 생명을 앞구멍(입)으로 먹고 소화 시켜 뒷구멍(항문)으로 배설하고 끝내 우리 몸도 분해되듯이.

낙엽은 매년 쌓인다. 자연계에서 분해를 담당하는 미생물들이 없다면 지구는 낙엽으로 덮일 것이다. 산의 축축한 부엽토처럼 그것은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우리의 의식 밖에서 이루어진다. 잘해야 본전이고 하지 않으면 티가 나는 청소나 세탁과 같은 그림자 노동. 인간계에도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넝마주이의 역할과 그들이 살았던 풍경에 대해 책의 한 장을 할애한다. 일본어로 바타야(バタヤ)라 불리는 이들은 역자(박성관)에 의해 ‘양아치’로 번역됐는데, 그가 각주에 달아둔 장석만의 <양아치론>과 같이 읽으면 다쓰시의 문제의식과 상통하는 지점이 보인다. 장석만은 양아치가 동냥아치에서 ‘동’이 탈락한 것이 아니라 ‘양(洋)’과 ‘아치’의 결합이라고 본다. 양(洋)이라는 접두어는 서양 문명이 비서양 세계에 폭력적으로 뻗어간 제국주의 시기 이래로 그 우월성과 선진성을 상징하게 됐다. 양품, 양복, 양주, 양식, 양약 등의 단어가 그렇고, 의학을 따로 양의학이라 구분하지 않듯이 ‘구식’을 밀어내고 ‘보편’으로 자리 잡은 경우도 많다. 반면 양아치는 ‘양공주’와 함께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남의 위세를 빌려 생활하는 사람들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서양의 ‘좋은 것’이 아닌 성욕이나 먹다 버린 쓰레기와 같이 ‘더러운 것’에 기생(寄生)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본래 역할에 반전이 있다. 부대찌개의 유래처럼 양아치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먹다 남은 쓰레기로 끼니를 잇는 자이다. 그들에겐 그저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이었겠지만 생산과 분해 사이에서 가치의 역전을 말하는 다쓰시에 입장에서 보면, 그 행위는 고여있던 것을 다시 흐르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지구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는 권력에 기생하여 위세를 누리는 기회주의자 양아치와는 다른, 쓰레기를 줍고 수리하고 먹고 소화 시키는 ‘좋은 양아치’의 가능성이다. 

스마트하고 클린한 신품(新品)으로 넘쳐나는 세계에서 분해의 세계는 새하얀 변기 구멍 저편 어둡고 습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세계이다. 저자가 말하는 분해의 철학을 자기 생활로 지켜나가는 것은 ‘양아치’로 ‘탈락’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다른 시간관이 필요하다. 생활 수준과 편의가 직선으로 끝없이 ‘진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숲의 식사’가 되어 강과 숲의 생태계를 유지 시키고 다음 세대를 이어가듯이, 프뢰벨의 나무 블록이 생성과 분해, 응고와 해체, 맺음과 풀림을 반복하듯이 끊임없이 회전하는 무한한 동그라미. 큰 동물의 배설물을 동그랗게 굴리고 뭉쳐 자기 양분과 자식의 요람으로 삼는 소똥구리가 보여주는 시간이다.

물론 우리가 연어나 소똥구리가 될 순 없다. 그러나 의식은 인간의 족쇄이기도 하지만 가능성이기도 하다. 나비 애벌레는 어느 정도 자라면 땅을 파고 들어가 자기 몸을 곤죽으로 만든 후 번데기 상태에 돌입한다. 그리고 우화(羽化)한다. 물리적으로 번데기가 될 순 없지만 인간에게는 의식적인 가치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한 생각의 환생(還生). 

그래, 양아치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다. 쓰레기를 먹는다. 무너뜨린다. 분해한다. 거기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