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과 믿음 사이

2025-04-24     윤찬솔 칼럼·독자위원
<strong>윤찬솔</strong><br>풀무학교

돌고 돌아, 또 4월이다. 4월엔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은 이어진다. 아스팔트에, 세련된 카페에, 화려한 관광지에, 그리고 바다에 덮여있을 뿐.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제주 곳곳은 ‘일상적인 학살터’였다. 일상과 학살이란 말이 한데 묶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오늘의 제주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2003년에 나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규정한다. 2만 5000에서 3만여 명의 사람이 희생됐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이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는 3·1절 기념대회가 있었다. 경찰이 탄 말에 아이가 넘어지자 군중들이 항의했고, 경찰은 총을 쏘았다. 6명이 죽었으나 책임자 처벌도 사과도 없었다. 3월 10일, 이에 대한 항의로 제주도청 공무원, 제주 미군정청 관리, 현직 경찰 등을 포함한 민·관 총파업이 있었다. 미군정과 한국 군·경은 자기들이 벌인 일에 대한 고려는 없이, 검거와 고문으로 응답했다. 그들에게 제주는 북조선 세력과 통모한 ‘좌익의 소굴’이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며 군·경의 진압강도는 강해졌다. 

사람들의 인내는 임계점에 이르렀고,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무장대 350여 명이 봉기했다. 5월 10일 총선거에서 제주 2개 선거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며, 제주는 완전한 ‘빨갱이 섬’으로 인식됐다.

전쟁이었다. 해방 이후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기 주둔하면서부터 예견된 전쟁이었다. 무고한 죽음이 도처에 있었다.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도피자 가족들을 대신 죽였다. 반대로 무장대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적군과 아군의 이분법에서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토벌대에게는 ‘빨갱이’요, 무장대에게는 ‘반동’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수감 중인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라며 비행장에서, 오름에서 총살했고 바다에 수장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었다.

1978년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은 제주4·3의 진실을 알리는, 단편 《순이삼촌》을 발표했다. 그 여파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소설은 판금 조치됐다. 소설의 구체적인 배경이 되는 사건은 북촌 학살로, 마을 사람들 300여 명이 이틀 새 총살됐다. 순이삼촌은 총살이 진행된 그 옴팡밭에서 시체 더미에 묻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자기 아들과 딸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이후로도 신경쇠약, 결벽증, 환청, 피해의식에 고통을 받았으니 죽는 게 운이 좋았던 것인지 모른다. 사건 이후 3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 그녀는 그 옴팡밭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해묵은 죽음’이었다. 해소될 수 없는 응어리를 지닌 사람에게 삶은 죽음과 같다. 순이삼촌은 제주사람들의 그러한 고통을 상징한다.

민주적인 공간이 열리면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공식적인 사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 그러나 다 끝나진 않았다. 가해자들의 정체는 아직도 불확실하고, 일부 좌익 인사들이 희생자에서 배제된 상태고, 당시 미군정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규명과 미국의 사과는 요원하다는 현실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화해라는 것 자체가 완결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면에서 더욱 그렇다. 끝은 원래 없다.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과정에서 더디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뿐.
참 지난한 일이다. 아스팔트가 다 깔려버리고 난 뒤 역사적 사건으로서 제주4·3을 접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신경을 쓰면 쓸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고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잔인성과 그것을 추동한 거대한 힘 앞에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그런데 항상 어디선가 자기 책임이 아닌 일에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깊이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생채기를 바늘로 찌르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 그건 작별하지 않는 태도다. 같은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다는 끔찍한 사실 앞에서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시대다. 그렇기에 더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할지라도, 아스팔트를 숟가락으로 긁어내는 일에 불과할지라도, 적어도 화해와 용서를 편하게 말할 순 없다. 4월이 또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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