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는(taking) 사진에서 만드는(making) 사진으로
전주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사진전을 다녀왔다. 이 사진전의 제목은 ‘making: not taking’ 이었고 총감독은 미국 펜실베니아 아트·디자인대학 예술학과장 엑릭 윅스(Eric Weeks) 교수였다. 그는 전시된 사진들이 단순히 오브제를 재현(representation)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세계를 투영한 작품들이라는 설명을 하면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에 나오는 화가 바질 홀워드(Basil Hallward)의 입장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화가 바질 홀워드는 초상화를 단순히 외형을 재현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무의식적으로 투영하며, 작품에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과 욕망을 심어 넣는다. 바질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창조며, 그 창조 과정은 곧 작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는 “나는 내 영혼을 이 그림에 담았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바질에게 있어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외부 세계를 ‘taking’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세계를 ‘making’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진 예술의 흐름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사진이 현실을 정확히 기록하는 매체로 여겨졌다. 보도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등에서 사진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 근본에서 벗어난 행위다. ‘사진을 찍는다(taking a photo)’는 표현 자체가 순간을 포착해오는 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의 사진가들은 이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작업에 임한다. 그들은 장면을 구성하고, 조명과 색채를 조정하며, 피사체의 표정과 자세를 섬세하게 연출한다. 때로는 사진을 디지털 편집을 통해 재구성하며, 현실보다 더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려 한다. 그 결과 사진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과 내면을 ‘만드는’ 예술이 됐다. 포토샵을 거치지 않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개는 보정작업을 거쳐 완성도 높은 사진을 내놓는다. 오히려 보정작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바질이 강조한 예술가의 태도(자신의 영혼을 담아 창조하는 태도)는 오늘날 사진작가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이들은 피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복합성과 시대의 감성을 포착하려 한다. 초상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단순히 인물의 외모를 기록하는 것은 이제 구시대적 접근이다. 현대의 초상 사진은 모델의 표정, 자세, 심지어는 주위 환경까지 치밀하게 연출해, 한 사람의 정체성과 내면 세계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피사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석한 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작가들은 예술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바질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했듯이, 오늘날의 사진가들도 사회적 책임을 의식한다. 이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질문을 던진다. 인종, 젠더, 환경, 정체성 같은 주제들은 이제 사진 예술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이 단순한 개인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대화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반영한다. 이번에 전시된 마날 아부 샤힌(Manal Abu-Shaheen)은 전쟁을 통해 파괴된 레바논의 도시 풍경을 기록하면서 전쟁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베이루트 시내에 걸린 서구 광고 이미지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서구의 지속적인 문화적, 경제적 영향력에 대한 은유적 표현임을 보여주고있다. 특별전 ‘ENTANGLEMENT’에서 여성작가 심명희는 개인의 건강 트라우마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여 극복하려는 의지를 이미지화했는데, 그녀의 작업을 라캉의 ‘주이상스’로 환원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오스카 와일드가 19세기에 던진 질문 ‘예술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술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인간의 내면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했으며, 현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이 전통을 잇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은 단순한 기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과의 대화를 위한 깊은 울림을 품고 있다. 예술이란 결국, 작가가 자신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이 그릇은 벤야민이 말했듯이 시대의 물결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AI가 그림을 그려주고 사진을 찍어주는 시대에도 AI에 입력을 해야 하는 작가의 깊은 사유(思惟)는 예술의 근원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