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암흑에서 길어 올린 글자, 시(詩)가 되다
우리지역 각양각색 문화예술인 ⑩정세훈 시인
[홍주일보 홍성=이정은 기자] 홍성 장곡면에서 나고 자란 정세훈 시인은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걸었다. 그는 1989년 첫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을 시작으로 2024년 ‘고요한 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시집·동시집·장편소설·장편동화집·그림동화·산문집 등을 썼으며, 광천읍에 위치한 노동문학관의 관장이기도 하다.
지난 7일 시인을 만났다. 그는 흔연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고 노동문학의 시작과 과정에 대해, 전시된 책들에 대해 나긋이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내려앉는 발자국 같았다. 한 마디, 한 자국, 한 마디, 한 자국. 어엿한 봄인데도 창밖에선 내내 눈이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열일곱 소년공이 되다
유년 시절부터 문학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정세훈 시인은 “어릴 적부터 시인이 돼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후 중학생 시절, 선생님께 문학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했고, 그 결과 졸업 무렵엔 라디오 연속극 극본(30일 방송 분량, 원고지 1200매) 기법을 터득하게 됐다. 그러나 가정 형편 탓에 갓 열일곱이 된 소년은 살아 나갈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불가피한 현실에 하릴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 객지살이를 선택한 시인은 문학과는 거리가 먼 ‘소년공’이 됐다.
“큰 공장은 가고 싶어도 나이가 워낙 어리니까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작은 규모의 공장에서 일하게 됐어요. 그러니 환경이 굉장히 열악했죠.”
밥벌이에 나선 소년은 소규모 에나멜 공장에서 굵은 구리 선을 가늘게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화공약품이 타들어 가는 냄새는 참, 고약했다. 소년 또래의 아이들은 자꾸만 피를 토하고 얼마 머물지도 못한 생(生)을 떠났다.
■ 이유도 모르고 이끌려
“책이 너무 읽고 싶어서 청계천 고서점(헌책방)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소년은 쉬는 날이면 청계천으로 향했다. 냇가 양옆에 즐비한 고서점에 온종일 붙박여 책에 담긴 글자를 마시고 새겼다. 살기 위해 물을 마시듯, 궁극에 가닿기 위한 무엇을 각인하듯.
허구한 날 그곳으로 걸음 하면서도, 소년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강한 이끌림에 기분 좋게 지고 마는 나날이었다. 책방 아저씨들은 그런 아이가 기특해 타박하지 않고 예뻐했다.
“그때 독서량이 엄청났어요. 작가, 장르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읽었어요. 책방에 가면 숨통이 트이고 살 것 같았어요.”
■ 득병과 시(詩), 쌓이고 쌓여
몸 가죽이 가려워 벅벅 긁던 어느 날, 시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사이 소년공은 숙련공으로 성장했다.
“온몸에 발진이 올라와 처음엔 피부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진폐증 전조 증상이었더라고요. 공장에서 일하면서 늘상 만지던 석면이 문제였어요. 또래 아이들이 피를 토했던 것도 당시엔 폐결핵인 줄 알았는데, 그것 또한 진폐증이었던 거예요.”
소년공의 몸에 침투된 석면은 20여년간 쌓이고 쌓여 숙련공의 몸에서 발병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가, 축적된 또 다른 무엇이 기침에 섞인 가래처럼 튕겨 나왔다.
“진폐에 걸려 공장에 못 나갈 때, 이육사, 한용운 등 일제 저항 시인들의 시를 읽게 됐어요. 그들의 시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제 처지에 맞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미친 듯이 시를 썼어요.”
그는 쏟아져 나오는 미상(未詳)을 파지 위에 급히 휘갈겼다. 발작적인 속도가 힘에 부쳐 똑바로 써 내려갈 수 없었다. 밥을 먹다가도, 잠시 쉬다가도, 집에 누워있다가도 그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왔다. 표피가 벗겨진 형태로, 뜨거운 성질로, 그래서 피부보단 내장과 닮은 언어로, 그리고 그것들은 시(詩)가 됐다.
■ 공장 노동자에서 시인으로
그는 스물아홉에 나타난 진폐 증상에도 쉽사리 공장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증상이 악화되면 잠시 쉬고, 호전되면 다시 일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서른아홉이 돼서야 완전히 손을 뗐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썼던 시를 여러 잡지사에 투고했어요. 어느 날 편집자가 공장으로 전화가 와서는 ‘시가 너무 좋다, 다음 달에도 실을 수 있겠느냐’ 제안하더라고요.”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신문사 사회부 기자의 눈에 띄어 첫 시집 ‘손하나로 아름다운 당신’이 출간됐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분이 저희집으로 신방을 오셨는데, 그분이 지역 신문사 기자셨거든요. 집에 쌓여있는 시를 보시더니 너무 좋다면서 책으로 내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 첫 시집은 기자들이 만든 책이에요.”
1989년 태어난 그의 첫 시집은 신문사와 방송사에 연이어 소개됐다. “한 3년간 각종 교양 프로그램에 불려 다녔어요.”
시인은 이어 말했다. “절대 우쭐하지 않았어요. 만약 그랬다면 문학도 인간(자신)도 망쳤을 거예요.”
공단마을 4
-모순-
공장들이 즐비하듯
예배당도 많습니다만
손바닥만한 내 집 하나 없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가 쉬는 일요일에는
예배당에 나가 고개 숙여 빕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빕니다.
십계명 중에서도
네 번째로 무거운 죄인 줄 알면서
저지른 죄이니
모르고 지은 죄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나 더
무거워 진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직껏 공순이 아내와 함께
가난 같은 두 아이를
하나씩 옆에 끼고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두손 모아 빕니다.
시인의 첫 시집
‘손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中
정세훈 시인의 글, 시(詩)에는 현실의 불평등과 부조리가 담겨 있다. 그 안에 힘없는 노동자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한결같이 극복과 희망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쓰는 자는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 외의 것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심중한 눈빛을 지닌 아이는 헌책 속에서 빛을 길어 올렸다. 제 앞에 닥친 암흑 속에서도 같은 것을 길어 올렸다. 비견될 무엇은 어둠에서 무럭 자라나 ‘극복’으로 쓰였다. 그늘을 삼키고 희망을 토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글자는 마침내 시(詩)가 되어 세상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