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지역 “100년 고택 감싼 아름다운 100년 흙돌담마을”

충청문화유산 재발견, 옛담의 미학-돌담이 아름다운 마을〈4〉 서산 고북면 가구리마을 흙돌담

2025-06-12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서산시 최남단 고북면, 최고 품질의 간척지 쌀·유기농 황토밭 농특산물 
고북면 가구리마을, 김동진가옥 100년 흙돌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큰 길가에서 산자락까지 사방 300여 미터 전체 흙돌담으로 둘러쌓였다
서산지역, 한다리마을 경주김씨고택·정순왕후생가, 유기방고택 등 흙돌담

 

지금의 충남 서산은 삼한 시대에 마한에 속했으며, 현재 지곡면 일대에 마한의 소국이었던 ‘치리국국’이란 부족국가가 형성됐다고 한다. 백제 시대에는 ‘기군’이란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이는 문헌상 확실하지 않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755년) 부성군이 된 것이 연원으로 봄이 옳다는 의견이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4년(755)에는 ‘부성군’, 고려 충열왕 10년(1284)에 처음으로 ‘서산’이라 불려오다가 충열왕 34년(1308)에 ‘서주목’으로 승격됐으며, 다시 충선왕 2년(1310)에 ‘서령부’로 개칭됐다.

‘부성군’은 옛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성 아래 자리 잡았다고 하니 지명을 ‘부성산성’에서 얻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부성군에 진성여왕 7년(894년)에 태수로 최치원이 부임하기도 했다. 고려 인종(1123~1146) 때는 부성군에 현령을 뒀다. 하지만 명종 12년(1182년)에 고을 사람 호장이 현령을 잡아 가두고 협박해 역모의 땅으로 낙인찍혀 관호마저 제거당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부성군은 폐군이 돼 인근 운주에 붙여지게 됐다고 한다.

서산(부성군)이 되고 다시 복군 된 것은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충렬왕 13년(1284년)이다. 충렬왕은 당시 서산주민 정인경이 괴산과 신창에 침입해 진을 친 몽고군을 습격, 많은 전과를 올린 것을 가상히 여겨 다시 군으로 회복시켰다. 부성군은 복군이 되면서 ‘서산군’으로 이름이 바뀐다. 아울러 지군사로 승격됐다가 충렬왕 34년 (1308년)에는 다시 ‘서주목’으로 승격했으나 서산군은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서령부’로 강등됐다가 다시 지서 주사로 강등됐다. 사학자들은 서산군의 잦은 강등과 복군 이유를 지역주민들의 모반이나 대역죄보다는 당시의 잦은 관 체제의 개편으로 풀이하고 있으나 길지로써 지세가 센 탓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서산은 이후에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7~8차례 지위 격하와 복군의 성쇠를 반복한다. 태종 13년(1413년) ‘서산군’으로 회복한 이 땅은 숙종 21년(1695년)에 강등됐다가 18년 만에 다시 회복됐으며, 20년만인 영조 9년(1733)에 또 다시 현으로 강등됐다. 이어 9년 후 다시 군으로 회복한 서산은 다시 정조 원년(1777)에 현으로 강등, 9년 후 복군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태안과 해미를 병합한다. 이렇듯 역대 왕조의 관제개편으로 군세의 부침을 거듭한 서산은 이후 1988년 말까지 74년간 충남 제일의 군으로 성장을 재촉, 길지로써 용트림을 시작했다. 이윽고 1989년 1월 1일 군에서 시로 승격한 서산은 서해안 시대라는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 고북면 ‘가구리’
서산의 고북면은 원래 홍주목의 속현이었다. 고려 초 몽웅현사람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대광이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는 연유로 고구현 관할에 있던 현 해미면 지역이 정해현으로 승격 분할됐다. 고구현은 고북면 지역과 현 홍성군 갈산면 지역으로 축소됐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목 고북면으로 있었는데,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해미군 상도면과 하도면으로 바뀌었다. 이때 마을은 더 세분됐는데, 상도면과 하도면은 대체로 현 국도 29호선을 기준으로 동편은 상도면이고 서편은 하도면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서산군 고북면이 됐다. 조선 시대부터 고북면 소속으로 내려오던 하도면 소정리 일부가 분할돼 ‘홍성군 고도면 취생리’로 되고 상도면 수한리 중에서 일부가 분할돼 같은 홍성군 고도면 운곡리로 떨어져 나갔다. 또 ‘해미군 동면 시산리가 용암리로 편입되고 홍성군 고남상도면 성촌리 백야리’의 일부가 분할돼 양천리로 편입됐다. 따라서 고북면 지역은 가구리, 신송리, 장요리, 초록리, 용암리, 신상리, 신정리, 남정리, 기포리, 양천리, 정자리, 봉생리, 사기리 등 13개 리로 분할·통합 개편됐다. 1983년 8월 15일에는 대사리가 홍성군 갈산면으로 이속됐다. 향토사연구 자료에 의하면 마한 시대 54개국의 하나인 감계비리국이 대사리를 중심으로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현재의 고북면소재지인 가구리는 조선 시대에 홍주목 고북면 궁기리와 도간리, 가구전리 불렸다. 1895(고종32)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해미군 상도면 도간리, 창동, 가구전리로 바뀌었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도간리와 창동, 가구전리, 초록리 일부씩이 합해져 한 동리를 만들면서 가구전리에서 이름을 취해 지금의 ‘가구리’가 됐다.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고북면의 중심지로 인구가 점점 늘어날 것을 예상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003년 7월 당시 가구리는 고북면 소재지로 267호에 792명이 살아 고북면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당시엔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이름인 ‘가구리’라는 이름이 딱 맞았으나 이후 저출생 등 인구감소로 인해 가구리마을은 현재  249세대, 456명으로 20여 년만에 절반 가까이 줄었다. 

서산시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북면은 최고 품질의 서산간척지 쌀과 붉은빛의 유기농 황토밭에서 자란 알타리무우, 딸기, 고구마, 화훼작물, 블루베리 등 농특산물을 생산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고택 전체를 둘러쌓은 아름다운 흙돌담
고북면 소재지인 가구리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1800년 무렵에 건립된 서산김동진가옥(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1호)은 조선 시대 후기 가옥의 모습과 흙돌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김동진가옥은 초가가 아니라 옛 전통의 기와집이다. 면적은 1068㎡로 안채, 사랑채, 익랑채, 대문채가 배치돼 있는 모습으로 잘 보존돼 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와 21칸 규모의 한식 목조로 된 창고 채, 블록조의 창고건물 등이 있으며, 토담이 전체 대지를 둘러싸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11칸, 측면 7칸 규모이며 ‘ㅡ자’ 평면 형태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ㅡ자’형 평면 형태의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다. ‘ㄴ자’ 평면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좌측으로 치우쳐 사랑채가 있으며, 그 뒤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에 중문채가 사랑채와 붙어있으며, 1칸의 대문간으로 출입할 수 있다. 중문채 밖으로 담장과 연결된 쪽문과 창고 채가 있다. 원래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ㄷ자’형 평면이었다고 한다. 안채는 1972년 건물이 축소됐다고 하며 중문채에 부속됐던 곳간은 소실됐다. 

주변에는 산자락이 낮고 집 앞으로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산자락 구릉 남향에 터를 잡아 가옥을 배치했다. 큰 길가에서 산자락까지 사방으로 족히 300여 미터가 넘을 듯 가옥 전체를 흙돌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황토 흙으로 자연석을 가지런히 배열하면서 쌓은 흙 돌담으로 사람의 키 높이 이상 쌓아 올리고 기와를 얹었다. 집 앞쪽 길가의 흙 돌담에는 자연석을 넣어 쌓아 올리다가 위쪽에 서너 줄은 기왓장을 나란히 넣어 쌓아 올려 마무리하고 담 위에 기와를 올렸다. 원래의 집주인 김동진은 경주 김씨로 초대 면장을 지냈으며, 후학 양성을 위해 해미면에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김동진가옥은 부농의 민가로 1800년대 지어진 서산지역의 전형적인 부농의 전통가옥이다. 조선 시대 후기 가옥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연석과 황토 흙으로 만든 토담으로 대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흙돌담으로 빙둘러 가옥을 보호하고 있어서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이 바라다보이는데, 흙돌담은 황토와 자연석 돌을 섞어서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적조처럼 쌓았다. 담벼락에 비가 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지붕을 올려 쌓았다는 설명이다. 이 가옥의 소유자이자 관리자는 경주김씨 김종호 씨다. 지금까지 가옥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경주김씨 종가댁 으로 시집와 70여 년, 맏며느리인 조계연 할머니에 따르면 “시집올 때 시어머니로부터 150년이 넘은 가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사랑채는 한 차례 변경된 적이 있으며, 50여 년 전 안채의 방 두 칸과 대청 두 칸을 줄였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있던 벽을 헐어 중창했다”고 설명한다. 또 특이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중문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으며 문을 열면 지하 공간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드러난다. 외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게 구조화돼 있는 공간이다. 당시 시대상황과 관련한 어떤 특별한 목적의 공간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뿐인데, 당시 건축형식에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지하의 비밀 스런 장소’다. 

한편 사랑채의 상량문(上樑文)에는 ‘昭和七年壬申八月十四日上樑(소화칠년임신팔월십사일상량)’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193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순을 앞둔 조 할머니가 시집와 들었다는 얘기에 의하면 “이 가옥은 일본의 히로히토(裕仁, 1901~1989) 천황이 즉위한 소화 1년인 1926에 지었다”는 설명이다. 설명대로라면 안채는 1926년에 건축됐고, 사랑채는 193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가옥을 감싸고 있는 흙돌담도 1920~1930년대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100년 고택에 100년 흙돌담의 보존은 지역적 특성과 시대적 특징으로 인해 문화적·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19세기 서산지역의 전형적인 부농의 가옥과 흙 돌담은 건축학적·향토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다.

서산지역에는 김동진가옥(충청남도 민속문화유산)을 비롯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 경주김씨 집성촌의 정순왕후생가(충청남도기념물 제68호), 경주김씨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99호), 운산면의 유기방고택에서도 아름다운 흙 돌담과 흙으로만 쌓은 토담을 만날 수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