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2025-06-11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strong>최명옥<br></strong>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열일곱 살 A양은 겉보기에 또래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틱톡 방송을 하고, 셀카를 찍고,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자신을 꾸민다. 하지만 겉모습 뒤에는 말하지 못한 삶의 무게가 숨어 있다. 마약 사용의 이력, 반복되는 분노, 불안정한 가족사와 경제적 어려움. A양의 하루는 언제나 긴장과 고립의 경계에서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었고, 세상과 자신 사이에 벽을 세우는 일이었다.

처음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오라고 해서 왔지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아요.”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고 싶은 갈망이 담겨 있었다. 오래도록 눌러온 이야기들이, 마침내 안전한 공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A양은 수많은 셀카를 찍고, 코스프레 행사에 참여하며, 틱톡 방송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겉으로는 유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나를 좀 봐주세요”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강한 척하는 표현들이 겉을 둘러싸고 있다. “나도 괜찮은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그렇게나마 전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매 순간 자신과 싸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거절당할까 두려운 마음 사이에서. 그래서 더 눈에 띄게, 더 과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 모든 표현의 밑바닥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A양의 어머니 역시 두려움 속에서 버티며 살아왔다. 반복된 관계 실패, 경제적 불안, 아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 모든 무게가 어머니를 조용히 무너뜨렸다. 딸에게 욕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어머니는 말했다. 

“저희 엄마도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지만, 우리에게는 한 번도 욕을 안 했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어요.”

그 말 속에는 지키고 싶었던 사랑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하려 한 보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감정을 나누지 못한 관계는 쉽게 오해로 이어진다. “딸이 원하는 건 다 해줘야 해”라는 마음은 통제가 아닌 두려움에서 비롯되었고, 건강한 경계를 세우지 못한 채 서로를 힘겹게 붙잡았다.

A양은 “엄마는 내 말을 안 들어줘”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제발 나를 믿어줘요”라는 외침이 숨어 있다. 어머니는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하지만, 진짜 마음은 “너라도 무너지지 않았으면”이라는 간절함이다.

그러나 변화는 멀리 있지 않았다. A양이 상담자에게 조심스레 포옹을 건네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 그 순간. 그것은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었다.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관계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징조였다.

물론 아직 위험은 남아 있다. 틱톡 방송은 그녀에게 소속감을 주지만, 동시에 성적 대상화의 위협도 내포한다. 그러나 그녀는 예술적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지닌 아이이다. 상처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가능성이, 그녀 안에 살아 있다.

진짜 변화는 누군가가 귀 기울여 줄 때 시작된다.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 말은 단순한 감사가 아니다. 살아가고 싶은 마음, 다시 연결되고 싶은 소망이 담긴 문장이다. 지금 이 순간, A양은 그렇게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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