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특집] 홍성의 건국준비위원회, 좌파세력과 인민위원회 개편

광복 80주년, 우리지역의 광복을 다시 읽다 〈3〉

2025-06-27     한관우 발행인

1945년 9월 중순부터 당시 도립홍성의원 원장인 이인규의 지도하에 인민위원회 조직의 움직임이 홍성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서 홍성에 조공의 세포를 만들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개편하려는 작업을 위해 송길한이라는 사람을 파견했다. 

송길한은 김동진, 한보국, 이광순, 전명재 등과 접촉했고, 9월 26일에는 박헌영이 파견한 배 모라는 사람이 자치위원회를 찾아와 대전에서 개최되는 ‘충남도인민위원회 결성대회’에 대표 2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손재학은 인민위원회에는 대표를 파견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한보국, 김동진, 이광순 등 좌파는 반발했다.

결국 손재학 등 우파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개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 군정 행정관이 온 뒤에 해체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손재학은 9월 28일 서울로 갔던 유승준이 돌아오자 회의를 소집해 “이제 우리 지방에도 미 군정 행정관이 왔고, 경찰 역시 정상화하고 있으니 더 이상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 오늘로 해체를 선언하자”고 주장, 이를 관철시켰다. 이어 자치위원회의 회장단은 군수를 찾아가 그동안 사용했던 ‘안회당’ 건물을 반환했다. 

이로써 치안 유지를 위해 발족했던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 홍성지부는 한 달여 만에 해체됐다. 이는 자치위원회의 우파가 더 이상 좌우 동거의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자 좌파는 본격적으로 인민위원회 결성을 준비해 10월 1일 결성식을 갖고, 이인규를 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홍성읍사무소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 인민위원회 위원장 한보국, 만해 한용운 아들
인민위원회는 일차로 마쓰모토 군수를 소환해 각목 세례를 퍼붓고 사설 감방에 가뒀다. 이는 마쓰모토 군수가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매일 직원들을 소집해 동방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게 하는 등 자숙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어 인민위원회에 접수부를 두고 행정과 경찰행정을 인수하고자 했지만, 미 군정이 9월 말에 이미 진주한 가운데 군 행정의 인수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인민위원회는 인민위원장 이인규와 보안부장 김동진이 나서서 경찰서를 접수하기 위해 당시 경찰서장 박유진과 담판을 했지만 협상이 여의치 않자, 10월 7일 새벽 월산, 남장, 마구형, 간동, 옥암리 등의 주민을 동원해 곤봉, 삽, 괭이 등을 들고 경찰서를 습격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한 가운데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민위원장 이인규와 보안부장 김동진은 홍성을 떠나야만 했다. 인민위원회는 한보국을 위원장으로 다시 선출하고, 보안부장도 전명재로 교체했다. 당시 인민위원회에 참여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이인규→한보국, 총무부장: 이인현, 조직부장: 이태현, 보안부장: 김동진→전명재, 노동부장: 전주봉, 재정부장: 강의택→강창록, 보건부장: 조영행 등이다. 이들 외에도 이강세, 김정환 등이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

한보국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아들로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다섯 살 되던 1930년 서울의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재학시절 창덕궁 근처의 민중서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와 ‘제2의 가난에 대한 이야기’ 등의 판매 금지된 책을 구입, 친구들과 함께 독서회를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에 귀향해 홍북면 내덕리 사람인 강씨와 결혼한 뒤 슬하에 큰딸 영숙 등을 두고, 외갓집에서 준 밭 400여 평을 가지고 농사를 짓다가 홍성읍에 나와 오관리 474-3에 철물점을 차리고,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면서 손재학, 유승준 등과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홍성군인민원회 위원장, 1928년에는 신간회 홍성지회 간사,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등 홍성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좌파진영의 지도자였다.

이태현(1916년 생)은 오관리에서 출생해 홍성공업전수학교와 1937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의 고용원으로 있으면서 같은 홍성공업학교 출신인 전명재를 비롯해 박종세, 김정환, 정봉수 등은 동아일보 지국과 철물점을 운영하던 한보국과 교분을 갖게 됐다.

홍성군인민원회는 각 면 단위까지 조직을 했는데, 광천읍에서는 장인갑, 황규경, 이두성을, 구항면은 이차흥, 이원희를, 홍동면은 이관세, 김형준 등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광천의 장인갑은 세브란스의전 출신으로 광천의원을 운영했다. 이들 인민위원회는 10월 19일 미군이 홍성에 본격 진주하면서 미 군정과 경찰의 탄압, 우익세력의 폭력 등 위기에 처하게 됐다.

홍성군인민위원회는 당시 농민조합을 주요 기반으로 했다. 농민조합장 이민영(37세)과 간부 이민혁(35세), 이완수(34세), 이강세(40세), 이강문(38세), 구항면농민조합장 이차흥 등이 있었다. 또한 광천읍조합장 이두성(45세), 부조합장 황규경(40세), 간부 장인갑(45세), 이헌구(35세), 김오진(40세) 등이 있었다.

이들 중 1945년 12월 8~10일에 열린 전농결성대회에 홍성군대의원으로 이강세, 이민혁, 김우진 등이 참석한 것으로 돼 있다. 이강세(1909~1950)는 홍동면 금당리 황새울에서 와아들로 태어나 홍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홍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농업노동자로 3~4년 동안 체류하다가 귀국해 이묘희(1988년 미국에서 작고)와 결혼하고, 홍성읍에서 ‘풍농원’이라는 종묘상을 차리고 옥암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본에서 배운 농사법을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가야동지회에 참여했다.

이차흥은 홍성공업전수학교 재학시절 광주학생운동에 호응, 읍내에 격문을 뿌리고 시위를 하다가 퇴학을 당했고, 해방 이후에는 구항면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민혁은 예산농업학교 출신으로 전북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가 홍성으로 돌아와 농민조합에서 활동했다. 김우진은 김좌진의 일가로 중국에서 돌아와 갈산면에서 활동했다. 당시 농민조합은 일제가 약탈한 전쟁물자, 새끼줄과 가마니, 비료 등을 무상으로 분배하고, 3·7제 소작료의 관철을 위한 투쟁과 농민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인민위원회의 또 다른 세력기반은 청년동맹과 노동조합, 부녀동맹 등이었다. 홍성군청년동맹 위원장은 임선관(30세), 간부는 이광순(35세) 등이 있었다. 노동조합장은 김병규(35세)였고, 부녀동맹 위원장은 한보국의 부인 강씨가 맡았다. 이밖에도 법원, 군청, 면사무소, 금융조합 등 각 직장 단위로 직업동맹이 결성돼 활동했다.

미 군정과 경찰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은 1945년 12월경부터 시작됐는데, 미 군정은 구항면농민조합장 이차흥과 5명의 농민조합 간부들이 일제 말 미곡공출과정에서 부담을 주민들에게 전가하고 공출에서 빼돌린 구항면 이장 김호면의 쌀을 해방 직후 압수해 주민들에게 분배했다는 이유로 폭력행위로 구속됐다. 
 

또 1946년 2월에는 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전명재는 해방 직후 환전상을 불법 감금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8개월간 복역했다. 1946년 3월에는 인민위원장 한보국도 1945년 10월 광천의 일본인 금광업자가 금괴를 몰래 처분해 도망가려는 것을 적발·압수한 일을 이유로, 조직부장 이태현, 보안대원 박태원 등과 함께 구속돼 10개월 형을 언도 받았다. 


■ 좌파세력 결정적 몰락은 1946년 10월 항쟁 
한편 홍성군인민위원회 사무실이 홍성읍사무소에서 쫓겨나 적산가옥인 일본인의 여관인 ‘비전옥’으로 옮겨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1945년 12월 17일 농민조합원들이 홍성경찰서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별무효과였다. 이 시기는 홍성군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다른 지역도 1946년 1~2월 경 미군과 경찰력을 동원, 무력화에 들어갔다. 

또 인민위원회를 약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신탁통치에 대한 좌익의 태도급변이었다. 인민위원회는 신탁통치가 전해졌을 때 반탁의 입장을 표명하고 홍성에서 신탁통치반대 군민대회 참여를 약속했다가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꿔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에 우파는 좌파를 ‘민족반역집단’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일반 대중들도 인민위원회를 지탄의 대상으로 삼게 됐던 것이다.

1946년 1월 21~22일 대전에서 개최된 충남도인민위원회 군 대표자회의 석상에서 홍성군 대표들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입장변화의 결과 인민위원회의 공신력은 떨어지고, 대중적 반감으로 활동력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좌파세력의 결정적인 몰락을 가져온 사건은 1946년 10월 항쟁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경북과 경남, 전남으로 주로 파급됐다. 

충남에서는 홍성, 예산, 서산, 당진 등에서만 봉기가 있었다. 

홍성에서는 10월 18일 새벽 2시 갈산과 구항의 경찰지서가 습격당했다. 갈산의 경찰들은 홍성으로 도망쳐 왔고, 새벽 6시 좌익들의 홍성 습격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새벽 6시 일부의 군중들이 곤봉을 들고 홍성읍 내 동쪽에 모여 홍성 시내로 행진해 왔다. 이들이 홍성국민학교 근처에 다다랐는데, 경찰이 발포해 4명의 군중이 숨지고 이들은 가까운 언덕으로 흩어졌다. 

홍성에서의 봉기 당시 군중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돌려줄 것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미 군정의 폐지를 주장했다. 또 미 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한민당과의 동맹을 비난하고, 토지의 평균분배, 쌀의 공평한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을 요구하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홍성에서의 10월 항쟁은 미 군정에 대한 저항, 미소공동위원회 등의 조속한 재개 촉구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취약해진 대중적 기반마저 경찰 앞에 그대로 드러내 좌익세력의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