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예술 그리고 미래

2025-07-03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strong>김상구<br></strong>전

인간은 자연환경과 타인의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하는 사람들처럼 타인과의 교류를 거의 거절한 채 원시적 삶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 현상이고 대개는 세상과 교류하며 살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던 것도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행복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텃밭을 일구며 마트에 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많지 않은 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대개는 타인이 생산한 식재료를 사용하거나 과학기술 제품을 이용하며 살아간다. 음식뿐만 아니라 타인이 만든 수공업 제품, 예술품들도 내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한다. 

주간지 <타임>은 인류의 삶을 향상시킨 과학기술로 바퀴, 인터넷, 컴퓨터, 인쇄술, 전기 등을 언급했다. 여기에 AI를 더 첨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AI의 발전은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AI의 등장은 카메라가 발명됐을 때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19세기 초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큰 변화를 겪은 것은 미술계였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으로 회화라는 고전시대의 예술관은 지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일은 사람의 손끝보다는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다. 초상화나 풍경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해 나가던 화가들은 방향을 수정해야만 했다. 사진기술을 배워 사진사로 변신하거나 그림의 화풍을 전환해야만 했다. 그런 일환으로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화가들의 그룹이 등장했다. 그 시대에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미술 비평가 루이 드로아가 그저 인상(impression)을 그리는 일당이라고 비평한 데서 그 이름도 유래됐다. 피카소와 같은 화가도 전통적인 사실주의 그림에서 벗어나 자기가 바라본 주관적 그림을 그려냈고, 있는 그대로를 모사하는 그림은 주류에서 밀려났다. 카메라의 등장이 미술계의 패턴을 바꾼 것이다.

AI의 등장은 산업혁명 시기만큼이나 인간의 문화를 바꾸고 있다. ChatGPT는 물어보는 질문에 서슴없이 대답한다. ChatGPT는 그 대답의 질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 전문가들마저도 ChatGPT를 이용해 그들의 사무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다. 변호사들도 의뢰인의 소송을 ChatGPT에게 물어보고 자신이 어떻게 소송을 이끌어 갈 것인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ChatGPT의 이용은 많아질 것이고, 스스로 학습해 가는 ChatGPT의 대답은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다.

ChatGPT를 이용해 자신의 결정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과물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람보다 AI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직업들은 AI가 대체하거나 AI를 이용하여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은 더 커질 것이다. 단순 디자인이나, 통·번역은 이미 AI로 대체돼 사용되고 있다. 디자인이나 어학 관련 학과들이 지방대학에서 폐과되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술 발전이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DALL·E2, Midjourney, Stable Diffusion라는 생성형 AI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그림들이 미술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고, 이런 그림들이 상당한 가격으로 미술 경매장에서 팔려나가고 있다. 이런 생성형 AI 프로그램들은 어떤 그림들을 그려달라고 언어로 입력하면 만족할 때까지 반복해 이미지를 생성해 준다.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AI와 협업체제를 형성하는 예술가의 등장이 낯설지 않은 현실이 됐다.

사진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진을 찍지 않고도 AI로 새롭게 이미지를 생성해 내고 있다. 포토샵에 이미지를 제공하고, 이 그림을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다시 생성해 달라고 입력하면 그 그림을 바탕으로 새로운 그림을 만족할 때까지 생성해 준다. 값비싼 카메라를 들고 꽃이나 풍경, 일몰, 일출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옛날 ‘청학동 사람’ 바라보듯 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문화를 바꿔놓기 때문이다. 물론 다큐멘터리 같은 사진 등에 적용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술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일이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예술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때그때 재정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주체가 꼭 인간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에 다수가 동의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서 AI로? 그러나 인간과 사이보그(cyborg)의 결혼, 신을 대체하고자 하는 AI의 준동(蠢動)과 같은 것에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개연성에 준비는 해야되지 않을까?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