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해자인가, 공범인가?”
보이스피싱 사건이 터질 때마다 뉴스에서는 ‘수거책’이 검거됐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일원으로 피해자의 돈을 받아간 사람이 붙잡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거책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처음부터 범죄 가담의 고의나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대부분 ‘단순 알바’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보이스피싱 조직은 ‘고수익 단기 알바’, ‘서류 전달직’, ‘현장 업무 요원’ 등의 문구로 사람들을 유인한다. 특히 취업이 어려운 청년층, 생계가 급한 무직자, 가정주부 등을 겨냥해 SNS 광고나 문자메시지로 접근한다. 또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베트남·몽골 등 외국인 유학생이 수거책으로 동원되는 사례도 많다. 이들은 언어와 정보에 취약한 상황에서 친구나 동료 외국인의 소개, 혹은 중국계 커뮤니티 앱인 위챗(WeChat)이나 ‘분투하자 한국(奋斗吧韩国)’ 같은 구인 플랫폼을 통해 ‘단순 심부름 알바’로 소개받고 가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분투하자 한국’은 국내에 거주 중인 중국인 유학생, 단기 체류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커뮤니티 어플로, 실제 구직·아르바이트 정보가 활발히 공유되는 공간이다. 이 과정에서 “정식 절차를 거친 일”이라거나 “위험한 일은 아니다”라는 식의 설명에 속아, 범죄에 연루되는 외국인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국내 대학에 재학 중인 외국인 청년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범죄에 가담하는 구조가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의 판단은 엄격하다. 형법상 사기죄는 ‘재산상 이익을 얻기 위해 타인을 기망하고 재산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한 경우’에 성립한다. 이때 직접 돈을 전달받고 이를 조직에 넘긴 수거책은 ‘실행행위자’ 또는 최소한 ‘방조범’으로서 책임을 지게 된다. 단순히 시킨 대로 움직였다는 사정만으로 면책되지는 않는다.
판례도 이 같은 법리 흐름을 따르고 있다. 대법원 2025. 5. 15. 선고 2024도19221판결은 “인터넷 구직사이트에서 ‘퇴직금·월급 정산 업무’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뒤 피해자들로부터 1억 6900만 원을 받아 조직에 전달한 혐의로 기소된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A씨에 대해, 수거책 역시 공모 공동정범으로서 구체적 범죄 구조를 인식했거나 미필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유죄 취지로 판시한 바 있다. 이 판례는 ‘단순 수거책이라도 공범으로 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명확한 법리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법원은 수거책이 되기까지의 경위와 개인적 사정을 일부 참작하긴 하지만, ‘범죄인지 몰랐다’는 주장만으로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수사기관은 수거책이 받은 지시 내용, 연락 방식, 전달 장소 변경 여부, 입금 계좌 형태 등을 종합해 ‘범죄 인식 가능성’을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돈을 받아간 사실 자체가 명확하다면, 단순 가담이 아닌 공범으로 기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실은, 경계선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특히 경제적·정보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청년, 주부, 외국인 유학생 등이 아무런 범죄의식 없이 조직에 연루되고, 결국 그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점점 더 정교하게 사람의 절박함과 무지를 노린다. 법은 모든 국민이 범죄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가졌다고 전제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보 격차, 경제적 압박, 사회적 고립은 사람을 판단 착오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특히 온라인 기반의 채용과 지시가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시대에는 범죄에 연루될 위험이 더욱 크게 증가한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이유로 형사처벌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범죄 구조의 말단에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공범’으로 몰기보다, 그들의 인식 수준과 유입 경로, 행위의 실질에 대한 면밀한 판단이 필요하다. 형벌은 사회적 책임을 묻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재범 방지를 위한 교정과 보호의 기능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보이스피싱 사건의 수거책은 그 자체로 처벌의 대상이면서도, 범죄의 구조적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이들이 왜 범죄에 연루됐는지, 어떤 환경에서 그런 판단을 하게 됐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법의 이름으로 또 다른 부당한 낙인을 찍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