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사총, 전국적 반일독립투쟁·의병항쟁 폭발시킨 도화선

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3〉

2025-07-31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홍주의병, 홍주 일대를 무대로 1895~189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
을사의병 중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인 홍주의병, 반일 무장투쟁 본격화 해
광복 이후 현 남산 뒤편 구릉지 안치 ‘병오항일기념비’ 세우고 추모제 지내
 “일본군, 의병을 추격 사살, 체포된 의병을 ‘작살’하는 잔인한 짓 저질렀다”

 

홍주의사총(洪州義士家)은 홍성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00여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말 홍주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 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명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다. 이곳의 창의사에는 이때 희생된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했다. 본전은 건평 14.7평이고 삼문이 설치돼 있다. 900의병의 유해가 묻혀있다 해서 ‘홍주구백의총’이라 부르던 명칭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바꿨다. 2001년 8월 17일 사적 제431호로 지정됐다.

역사적으로 홍주 지역의 의병은 홍주 일대를 무대로 1895~189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됐는데, 제1차 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 행위에 반대해 1895년 4월부터의 모병단계를 거쳐 단발령공포 직후 선구적으로 봉기해, 척왜 분위기를 전국적으로 고조시키며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제1차 봉기는 이설과 김복한이 중심이 돼 계획했다.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이설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김복한과 함께 상경해 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경무국에 수감돼 옥고를 치르게 됐다.1906년 2월에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을미의병 동지였던 안병찬, 을미사변 이후 청양에 낙향해 있던 이조참판 민종식이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과 연락해 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3월 15일경 예산 광시장터에서 1차 봉기했다. 창의대장 민종식 휘하에 모인 의병의 규모는 300~600여 명 규모로 이들은 홍주성을 점령 활동거점으로 삼기 위해 광시를 떠나 홍주성으로 진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청양 화성의 합천에 머물게 된다. 이후 3월 17일 새벽 일제 헌병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 박창로, 윤자홍 등 20여명이 체포되면서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만다. 이로써 제1차 홍주의병은 의병부대 결성 후 해산할 때까지 불과 2~3일에 지나지 않아 실패한다.

제2차 의병이 바로 1906년의 홍주성 전투다. 이 전투 역시 수백 명이 산화해 의병전쟁 사상 단일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냈다. 이후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 설치와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됐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됐다. 1905~1906년 국권 회복을 위해 민중과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일 무장투쟁이 본격화됐다. 

■ 홍주의병, 을사의병 중 가장 치열한 항쟁 벌여
먼저 1904년 7월 서울 교외의 조선 군인들이 일본의 만행에 격분해 반일의병부대로 전환한 이후, 원주·단양·제천·죽산 등 중부 일대에서 의병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에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에서 중군으로 활약했던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은 1905년 9월 원주 동쪽인 주천(酒泉)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 제천·청풍·횡성·홍천 등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했다. 그러나 활동도 개시하기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 회원의 습격을 받아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 부대의 의병들은 소규모의 부대로 분산해 죽령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펼쳤다.

을사의병 중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인 것은 홍주(洪州) 의병이었다. 1906년 3월 안병찬(安炳瓚)·박창로(朴昌魯)·채광묵(蔡光默) 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하고 홍주성(洪州城)을 점거하려 했으나, 도중에 합천(合川)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실패했다. 한편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1906년 3월경부터 충남지역과 전라도의 유생들을 규합, 의병을 모아 봉기를 추진하다가, 그해 5월 11일 이용규(李容珪)·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정재호(鄭在鎬) 등과 함께 홍산(鴻山)에 모여 봉기를 최종 결정하고 의군을 출동시켰다. 제2차 봉기는 민종식이 주도했고, 합천전투에서 탈출한 의병장 민종식은 전주의 친척집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이때 처남인 예산 대술의 이용규가 의병을 모집하고 식량을 준비하는 등 역할을 했다. 5월 12일 홍산군 지티(지금의 부여 내산면 지티리)에서 민종식은 4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재봉기함으로써 제2차 홍주의병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홍주성 점령을 목표로 삼고, 5월 13이 홍산을 떠난 의병부대는 남하해 서천을 점령하고, 다음날 비인을 점령하면서 남포를 공격한다. 남포읍성은 4일 만에 점령됐고 이때 1000여 명으로 불어난 민종식 홍주의병은 5월 19일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의병부대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 북문을 통해 달아났다. 홍주성 탈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식, 채광묵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홍주의병은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여 명, 창을 가진 의병 300여 명, 유회군(양반 유생) 300여 명 등 12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일본군이 5월 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부대를 몇 차례 공격하더니, 5월 31일 새벽 2시 30분부터 일본군의 홍주성 공격이 시작돼 오전 6시에 홍주성은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일본군은 홍주성을 점령한 후 의병들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80여 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이 체포된 것으로 일본군은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참모장 채광묵 부자를 비롯해 300여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다.

다나카(田中) 소좌가 인솔한 일본군이 5월 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군을 공격해, 30일 이후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5월 31일 폭격으로 조양문이 무너지고 중과부적으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해 시체가 대교리 일대, 홍주천 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됐다. 

을사의병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1895년의 을미의병과 큰 차이가 없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을사의병의 지도부는 여전히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이념도 위정척사사상에 기반한 반외세의식이었다. 이러한 양반 유생 중심의 의병은 민중의 애국심에 호소해 의병부대를 조직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 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다. 또한 전투력에서도 무기와 편제가 조잡하고 민병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전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화되고 군대해산과 함께 군인들이 의병에 참가하면서 반침략·반봉건 지향이 전면에 등장하고 민중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은 변화하게 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 홍주의병 유해, 남산 묘역 뒤편 구릉지에 안치
광복 이후 의병들의 유해를 현 위치인 남산 묘역 뒤편 구릉지에 안치하고 ‘병오항일기념비’를 세우며 추모제를 지냈다. 그런데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朴柱喆)과 홍성경찰서장 박헌교(朴憲敎) 등이 공무원 수십 명과 같이 현재의 홍주의사총이 있는 부근에서 식목 행사로 식수를 하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해 지역 노인에게 자문을 요청해 설명을 듣고 병오(丙午) 항일의병 시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것으로 판명, 충청남도에 그 사실을 보고해 도비를 지원받아 유골을 모아 이곳에 합장해 분묘를 조성, 현재의 모습이 있게 됐다.

이장 당시 묘역에서 동곳(상투머리에 꽂는 뼈로 된 것)이 3되 반 쯤 발견돼 이를 군청 창고에 보관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타버렸다는 당시 경찰서장 박헌교의 증언을 볼 때, 주로 선비들의 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볼 때 홍주의 의병(을미, 병오)전은 주로 내포 지방의 유림들이 중심이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의병대장 민종식(閔宗植)은 홍주성을 넘어 도피, 죽음을 면했으나 뒷날 공주에서 체포돼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면서  사형을 면했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자료인 ‘홍양일기’와 ‘홍양기사’, ‘조선최근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인, 많게는 수백 명이라는 기록이 확인됐다. 홍주군수 윤시영의 홍양일기(洪陽日記)에 의하면 “일본군은 의병을 추격해 사살했으며 심지어는 체포된 의병을 ‘작살’하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합장묘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 석을 둘렀고, 묘의 오른쪽에는 정인보(鄭寅普)가 짓고 심상직(沈相直)이 쓴 묘비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徇難義兵將士公墓碑)’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합장 분묘를 조성할 당시 족히 900명은 된다고 판단해 창의사(彰義祠)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홍주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洪州義士家)’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돼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