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자와 윤봉길의사 암장지를 다녀와서

2025-07-31     인정인 ​​​​​​​<윤봉길 시낭송회 회원>

지난 6월 6일, 윤봉길 시낭송단과 월진회 회원 스물네 명은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 고마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니 일본 내에서 윤봉길 의사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는 민간단체로 일본어로는 ‘도모노카이(共の会)’라고도 불리며, 일본 현지에서 윤봉길 의사의 순국지와 암장지 관리, 추모행사 개최, 한일 교류 활동 등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 윤봉길 의사 공의회 사무국장과 회원분들이 마중 나와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장 윤 의사 암장지인 가나자와로 향했다.

해방 후 6개월이 넘도록 찾아 헤맨 끝에 간신히 찾아낸 암장지는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일본 육군 전몰자 공동묘역, 다른 한쪽에는 민간인 공동묘역이 있는 허름한 구릉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까이에 쓰레기 매립장이 있어, 죽어서도 일본인 발길에 차이고 짓밟혔을 윤 의사의 영혼이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지 암장지의 위치가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오가는 발길에 혹시 들을 수 있을까 귀 기울였을 조국 독립 소식, 윤 의사의 간절함이 가슴 깊이 울려오는 듯해 잠시 눈을 감았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비석 옆에서, 스물네 살 윤 의사가 사형을 당하던 그날의 옷차림, 눈빛, 모습을 떠올렸다. 중국 4억 인구도 못한 일을 당차게 해낸 대한의 눈빛 한 편에서 인간 윤봉길의 처연함을 느끼게 되는 건, 내가 두 아이를 둔 엄마이기 때문일까. 거사를 앞둔 마지막 밤, 조국의 독립만큼이나 울컥울컥 떠올랐을 두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 흔들리는 마음을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라는 유언 같은 시를 쓰며 다잡았을 윤 의사의 긴 밤이 숨 막히는 적막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되찾아준 대한민국. 윤 의사가 그토록 꿈꿨던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과연 윤 의사 앞에 떳떳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윤 의사 영정 앞에 절을 올렸다. 
 

암장지 바로 인근에는 윤봉길 의사 순국 기념비가 있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주축이 돼 건립한 것으로, 매년 윤 의사 순국일에 기념식을 갖고 윤 의사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암장지를 나서는데, 안내 표지판에 누군가 송곳 같은 것으로 ‘암살자’라 깊게 새긴 낙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윤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칭하며 암장지마저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단체의 소행일 것이라 했다. 여전히 왜곡된 역사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암장지를 떠나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둘째 날에는 ‘동양 평화’에 관한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 장소에 도착하니 일본 월진회 회원들과 윤 의사 공의회 회원 30여 명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인사와 소개를 나눈 후, 현안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가나자와 현에서는 극우단체의 반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쉬지 않고 윤 의사 선양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일이 결국 일본의 미래를 위한 일임을 알고 있었고, 올바른 역사를 위해 진실의 물길을 내는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윤 의사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 결국 동양 평화를 위한 길임을 함께 공감하며, 민간 교류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는 값진 시간이었다.

셋째 날, 윤봉길 의사께서 사형을 당하고 암매장된 가나자와에서 3·1 독립선언문을 공연하는 날이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일본 월진회 회원들과 윤봉길 의사 공의회 회원들, 그리고 가나자와 주민들이 푸짐한 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각 가정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모아 차린 정이 넘치는 만찬이었다. 윤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칭하는 극우단체가 있는 일본의 한가운데서, 그가 그토록 원하던 대한의 독립을 외치는 독립선언문을 공연한다는 사실에 긴장되고 흥분됐다. 공연에 참석한 일본인에게는 번역된 자료를 미리 나눠줬다. 20~30대의 젊은이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했고, 학생, 주부, 교사, 농부, 교수, 시의원 등 많은 분들이 진지하고 긴장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는 윤 의사가 목숨 바쳐 기원한 대한의 독립을 되새기며 공연을 했고, 마지막에 태극기가 휘날리자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가슴이 뭉클하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일본 우익 단체에서 암장지 허가를 해준 가나자와 현을 대상으로 항소 중인 예민한 시국이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고 함께 감동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역사가 바르게 흐를 수 있는 건, 진실과 가치를 위해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임을 새삼 느끼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윤봉길 의사 공의회 회장인 다무라 미츠야키(田村 光昭) 교수는 이 일을 하면서 참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지만 일본의 미래를 위해 지식인의 양심으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윤봉길 의사는 일본의 초·중·고 역사 교과서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으며, 윤 의사를 역사 교과서에 실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월진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숨기고 삭제하며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않는 일본이지만, 윤 의사 공의회 회원 같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다행스러웠다.

함께 답사에 참여했던 전 국회의장 김형오 의원은, 한국 정치를 하면서 일본을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일본어를 공부하게 됐다고 하면서, 가나자와에서의 독립선언문 공연은 큰 의미가 있고 감동스러운 날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한 재일 교포는 눈물이 나와 말을 잇지 못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것, 그분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이 시대의 정신으로 되살린다는 것,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조국의 모습을 그려보며 용기 있는 실천을 해본다는 것. 윤 의사의 암장지를 찾아 떠났던 3박 4일 답사를 마치며, 스물네 명의 우리 가슴엔 세계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높이는 대한민국이 태극기처럼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