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종천·판교면 인구 2000명 붕괴, 도만리·후동리마을 53명

지방소멸 인구감소시대, 충청의 마을공동체 소멸위기 현장을 가다〈7〉

2025-08-14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서천군, 13개 읍·면 중 6개 면이 인구 2000명 무너져, 고령화율 60%
종천면의 인구 1958명, 가장 적은 장구1리마을 48명·도만리마을 53명
판교면의 인구 1892명, 인구 가장 적은 후동리마을 53명·고령화 67%
후동리, 충주지씨의 세거 집성촌 지계최 장군의 아들과 후손들이 세거

 

서천군은 2읍, 11면, 172법정리, 315행정리, 1284반, 737마을로 구성돼 있으며, 총인구 5만명을 힘겹게 지키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 면의 인구가 2000명대가 무너진 면이 전체 13개 읍·면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6개 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천군 종천면의 인구가 지난해 말 기준 1998명으로 인구 2000명이 붕괴되면서 판교면 1959명, 기산면 1518명, 마산면 1397명, 시초면 1196명, 문산면 1192명으로 이들 6개 면의 인구가 각각 2000명이 무너지면서 1000명대의 면이 됐다.

서천군에서 지난해 말 기준으로 면 전체인구가 1998명으로 면 인구 2000명이 처음으로 무너진 종천면의 경우 올해 6월 말 기준 1958명으로 6개월 새 40명이 감소했다. 종천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은 법정리인 도만리(都萬里)가 53명(남자 25명, 여자 28명)으로 지난 6월 말까지도 그대로이며, 행정리에서는 장구1리가 30세대에 48명으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이다. 서천군 전체인구 4만 7705명 가운데 65세 이상이 2만 596명으로 고령화율이 43%로 나타나고 있는데, 종천면의 경우도 1958명 가운데 65세 이상이 1127명으로 57%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말 1959명으로 2000명이 무너진 판교면의 경우 지난 6월 말 현재 1892명으로 6개월 새 67명이 줄었다. 65세 이상이 1105명으로 고령화율이 58%다. 판교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은 34세대 53명(남자 20명, 여자 33명)이 거주하고 있는 후동리마을이다.
 

■ 종천면 1958명, 인구 적은 도만리마을 53명
서천군 종천면은 서해안에 인접해 3.8km의 해안선을 따라 생태계의 보고인 천연 갯벌이 고루 형성돼 있다. 내륙으로는 차령산맥으로 인한 산악구릉의 기복에 희리산과 문수산이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산새가 수려하고 물이 좋고 공기가 맑았던 지역이다. 장항읍과 서천읍의 상수원이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희리산 휴양림이 조성돼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수리시설의 발달로 풍부한 농업용수와 비옥한 토질을 바탕으로 일찍이 논농사가 발달해 질 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특산품으로는 사질토에서 재배한 고품질 수박, 쪽파 등이 있으며, 가공식품으로는 맛좋은 조미김이 있다. 또한 국도 제4호선과 국도 제21호선, 그리고 장항선이 관통하고 있어 최근에는 해안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한 교통의 요충지로 급부상하면서 관광과 산업경제 등 지역의 제반 입지 강화로 새로운 활력이 기대되고 있다. 또한 종천산업단지에 25개 제조업체들이 입주해 지역경제의 든든한 기반으로 자리하고 있다.

종천면 도만리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비인현 이방면(二方面)의 지역이었다. 산세가 우람하고 또한 낮은 반면에 수려해 전국에서 명당지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백제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했다는 증거로 지석리의 관돌을 증거로 할 수도 있다. 충남 서부문화권이 내륙으로 접어드는 기점이 또한 이 지역부터다. 비인현(庇仁縣)의 전신인 비중현(比衆縣)이 백제 때는 종천면 지석리(支石里)에 있었으며, 지금도 아직껏 유적지가 남아 있다. 원래 이곳에 흐르는 종천(鍾川)의 이름을 따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종천면이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됐다. 종천면의 정착 대성(大姓)은 평산신씨(平山申氏)로 100여 호, 양근김씨(楊根金氏)가 90여 호, 진주김씨(晋州金氏) 70여 호가 대성으로 집성부락을 이루고 있다.

도만리 마을은 여전히 소규모 농업 중심으로 주민들은 전통적인 농사일을 하면서 일상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봉겸 이장은 “과수 재배 농가에서 진행된 단감농장 실험 사례가 있는데, 서천군농업기술센터가 도만리 소재 단감농장(3500여 평)에 보온 덮개를 설치해 제초작업 시간을 70% 이상 줄이면서 토양 건강성과 수확량 향상 효과를 확인했다”며 “이 사례는 토양의 생태 회복과 노동력 절감 측면에서 의미 있는 농업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종천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은 장구1리 마을로 30세대에 48명이다. 법정리에서는 도만리(都萬里) 마을로 인구가 53명(남자 25명, 여자 28명)으로 65세 이상이 33명(남자 15명, 여자 18명)으로 고령화율이 62%다.
 

■ 판교면 1892명, 인구 적은 후동리마을 53명
판교면 후동리(後洞里)마을은 서천에서 서북쪽인 부여 방향으로 8㎞쯤 가다가 보면 판교면 소재지를 조금 못 미친 마을이 후동리마을이다. 산세가 남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왜적 등 침입자로부터 마을 주민들을 보호해 왔다는 천연요새지로 불리는 곳이다.

후동리마을은 백제 때 비중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서림군의 영현인 비비현에 속했다가 조선말에 비인군 동면의 지역으로 뒷골 또는 후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방선리(方仙里), 후동리(後洞里), 궁동리(宮洞里), 이방면(二方面)의 만덕리(萬德里) 일부를 병합해 후동리라 해서 서천군 동면에 편입됐다가 1942년 판교면 후동리가 됐다.

원후동마을 앞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장항선이 지나고 있는데, 철길이 삼태기 형상인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 마을 주민들은 “삼태기 입구를 막아 놓아서 고무래질을 못하는 바람에 삼태기 안에 있던 곡식이 나가기만 하지 들어오지는 못해서 빈촌이 됐다”면서 “일본 놈들이 조선 사람을 못 살게 하려고 일부러 철길을 혈줄이 지나는 곳으로 철길을 냈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후동리는 1789년에 편찬한 ‘호구 총수’에 현재 후동리의 자연마을인 궁동리와 각동리(각골)의 명칭이 나타난다. 또한 1895년 간행된 ‘호서읍지’에서 명칭이 처음 보이는데 비인현 동면조에 궁동리, 방선리, 후동리의 지명이 확인된다. 1929년 간행된 ‘서천군지’의 기록을 보면 후동리에는 56호 총 286명의 주민이 사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판교면 전체적으로 볼 때 당시 가장 적은 수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판교면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후동리는 뒷골 남쪽 가로로 펼쳐진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각동 또는 갓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가에 있다고 해서 갓골, 각동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갓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후동리 마을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1950년~60년대로 40여 호가 살았으며, 방선마을은 1970년대까지 27~28호 정도가 거주했다고 한다. 주요 세거 성씨로는 후동에는 충주지씨 10여 호, 방선에 청주한씨 10여 호가 살고 있으며, 원래 후동은 충주지씨의 세거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충주지씨의 세거 집성촌인 후동리 마을 입구에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신 지계최(池繼崔) 장군의 충신문(忠臣門)이 마을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 충신문은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맞서 싸우다 순절한 충신 지계최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고종 19년(1881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충신문 안에는 정려의 사실을 알려주는 지계최 장군의 정려명정(旌閭命旌)과 사적. 건물보수기, 정려 후기도 걸려있다.

지계최 장군과 인조 임금의 여동생 전주이씨 사이에 2형제가 지경명, 지경징인데, 지경징은 충주지씨의 진사 부사직 경징공파로 ‘지경징과 후손들이 이곳 판교면 후동리에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후동리 마을에서는 칠월 백중 무렵에 동네 길을 닦을 때는 원후동에서 판교장으로 넘어가는 모과나무재에 있는 정자나무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예전에는 정월보름에 지냈지만 수십년 전부터 백중날로 바꿔 지내고 있다. 이 정자나무는 500여 년이 넘었으며 정자나무에 잎이 한 번에 크게 활짝 피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위에만 피거나 아래에만 피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정자나무가 있는 곳은 문산이나 서천 등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고 알려진다.

지금도 후동리마을은 판교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로 34세대 53명(남자 20명, 여자 33명)이 거주하고 있다. 65세 이상이 36명(남자 12명, 여자 24명)으로 절반이 넘는 67%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