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추풍령 웅북리 곰디마을·상촌면 수산리마을 돌담

충청문화유산 재발견, 옛담의 미학-돌담이 아름다운 마을〈9〉

2025-08-21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은 경상북도 금산군(金山郡)에 소속된 황금소면(黃金所面)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라 고려 때부터 추풍역(秋風驛)을 설치했다. 황금이란 지명은 현 사부리에 있었던 황보(黃寶)와 금보(金寶)라는 마을에서 유래됐다. 1906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충청북도 황간군에 편입됐고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황간군 오곡면(吾谷面)의 일부와 경북 상주군(尙州郡) 공성면(功城面)의 일부를 병합해 사부리(沙夫里), 추풍령리(秋風嶺里), 죽전리(竹田里), 작점리(雀店里), 관리(官里), 지봉리(池鳳里), 신안리(新安里), 계룡리(溪龍里). 웅북리(熊北里) 등 9개 리로 개편, 황금면(黃金面)이라 칭하고 영동군에 편입했다. 

1971년에 추풍령리를 추풍령1구와 2구로 분리했고, 1982년에는 신안리를 상신안리와 하신안리로, 1984년에는 관리를 관리와 학동(鶴洞)으로, 작점리를 작점과 작동으로 분리해 14개 리가 됐다. 1985년 관리를 관리와 후리(後里)로 분리해 9개 법정리, 15개 행정리, 31개 자연마을을 관할하게 됐고, 1991년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법에 의거, 군 조례 1332호로 추풍령면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러한 추풍령(秋風嶺, 220m)은 소백산맥에 있으며, 주위에 묘함산(733m), 눌의산(743m), 학무산(678m) 등이 솟아 있다. 예로부터 괴산군의 조령, 영동군의 추풍령, 단양군의 죽령 등을 통해 소백산맥을 넘었고, 이 가운데 대표적 관문은 조령이었다. 그러나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넘나드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일대는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이 조령까지는 높고 험한 장년기 산맥으로 이어지고, 조령에서 추풍령까지는 낮고 평탄해지다가 다시 높아지는 지형적 특색 때문에 교통의 요지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됐다. 

조선 시대에 이곳을 지나는 유생 중 일부는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고 해 ‘괘방령’으로 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계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이나 완만한 지역적인 특성상 각종 도로와 휴게소 등으로 인해 10m 이상의 마루금이 단절된 지역이다. 이렇듯 추풍령은 관로였다.

 ‘되도록이면 포도청 앞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이라는 풍습은 예로부터 이어진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폐습이었다. 별로 켕길 게 없는 나그네도 으레 관리들이 들끓는 역로를 피해 한가한 샛길을 찾기 마련이다. ‘늘 구린 게 많아 부러 트집을 잡는다면 털어 먼지 안 날 리 없는’ 장사꾼들이 그랬고, 구태여 역졸들의 농짓거리가 되기 싫은 천한 백성들이 그랬다. 또 있는데, 이름도 하필이면 ‘추풍’이라 과거 길에 나선 선비들은 모두 추풍령을 마다하고 한사코 괘방령을 넘었다고 한다. 

■ 추풍령 웅북리 곰디, 500년 돌담마을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와 경북 상주시 공성면 영오리 사이에 높게 솟은 국수봉(菊水峯, 795m) 정상에는 돌담과 제단이 있다고 한다. ‘나라를 지켜주는 산’이라 해 정상에서 제(祭)를 올린다고 한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이므로 ‘물을 움켜지었다’고 하는 뜻을 담은 국수봉 정상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민주지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백두대간 경상북도 상주, 문경, 김천 구간과 소백산까지 조망된다고 한다. 

이런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강 금강의 분수령이다.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해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추풍령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곰디마을) 마을에는 축조연대를 알 수 없는, 400~500년으로 추정되는 돌담이 동네 골목골목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서울과 부산의 반이 되는 곳이라 이름 붙여진 반고개 우측 해발 400m에 위치한 곰디마을은 하웅, 중웅, 상웅 3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웅이산 뒤쪽에 위치해 웅북리라 불린다고 한다.

돌담은 상웅마을과 중웅마을에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접경으로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우람한 은행나무는 국경을 표시하는 이정표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웅북리 전재성 이장은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00여 년은 족히 됐으며 높이가 35m, 둘레가 10m는 넘을 것”이라며 “임진왜란, 병자년 대홍수, 태평양 전쟁, 6·25 한국전쟁 등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 마을 주민들이 정갈한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 한해의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주변에 돌이 많아 담을 돌로 쌓은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연대는 잘 모르겠고, 마을이 생긴 이래 꾸준히 이뤄진 걸로 아는데, 지금의 돌담은 400~500년은 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마을의 돌담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강돌로만 쌓아 올린 돌담이다. 집과 텃밭까지 200여m를 돌담으로 감싸기도 했다. 주변에서 나온 자연석 강돌로 돌과 돌을 맞물려 견고하게 쌓았다. 돌담의 높이는 사람의 가슴높이를 넘지 않게 쌓아 집안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밭담도 보이고 집을 지을 때 돌로 축대를 쌓아 균형을 맞춘 집들도 있다. 높은 산비탈에 안긴 마을이라 주변에 돌들이 많았고 밭을 일구는데도 돌이 많이 나와 돌담을 쌓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산천에 둘러싸인 곰디마을은 임진왜란 때 관군의 부장으로 나라를 지키던 강산위 장군이 전투에서 패한 후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금녕김씨, 평산신씨, 밀양손씨가 들어와 평화롭게 마을을 이뤄 살고 있는 곳이다. 


■ 영동 상촌면 수산리마을 500년 돌담
영동의 상촌면 수산리마을은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마을 주민들이 지난 1991년 세운 마을유래비에는 동으로 황학산을 바라보며 서로 용암산 품에 안겨있는 이 마을은 울창한 숲 우거진 산속에 묻혀 있어 ‘수매마을’이라 불렀고. 이후 ‘수산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작은 산촌마을에는 볼만한 곳이 정말 많다. 이 마을에는 1978년 충청북도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삼괴당’과 근처의 ‘세심정’은 교육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1802년(순조 2년)에 중수했고, 남당 한원진의 ‘삼괴당기’와 송환기의 ‘삼괴당중수’, 윤봉구가 쓴 당호가 있다. 

또 하나 이 마을의 매력이라면 아름다운 돌담을 꼽을 수 있다. 돌과 황토 흙으로 쌓아 올리고 기와를 올린 방식의 옛스런 예쁜 돌담이 정말 매력적이다. 다른 지역의 돌담쌓기 방식과 비슷한데, 사용한 돌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석 강돌로 황토흙을 사용해 섞어쌓기 방식으로 쌓았고 높이는 사람의 어깨높이를 넘지 않는다. 일부는 강돌만으로 쌓은 곳도 있다. 강돌과 황토흙을 섞어 담장의 아랫부분은 큰 돌을 사용했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았고, 마무리는 기와를 올렸다. 돌담의 빛깔과 쌓은 방식이 정성스럽게 느껴지는 흙돌담이다. 이 마을의 정갈하고 집을 감싸고 있는 흙돌담은 1505년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흙돌담을 쌓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담길이 규칙적으로 형성된 것이 마을 형성시기부터 계획적으로 쌓기 시작했을 것으로 분석하는 이유라는 설명이다. 이 마을의 비교적 잘 보존된 오래된 흙돌담은 500년이 넘는 세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수산리마을에는 아름다운 돌담과 함께 600년 된 느티나무가 상촌의 중심을 지키고 서 있다. 삼괴당 남지언 선생이 세 그루를 심었다는데, 두 그루는 죽고 남아 있는 것은 한 그루라고 한다. 보통은 ‘삼괴’라고 하면 느티나무가 세 그루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아무튼 600년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신령한 모습이다. 옆에 있는 새끼나무 한 그루가 외로움을 달래준다. 남지언 선생이 느티나무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으면 호를 ‘삼괴당’으로 지었을까.

마을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는 당산나무로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가지가 하나씩 부러져 대동아전쟁, 6·25 한국전쟁 때 각각 떨어져 나갔다”고 전해진다며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으로 매년 음력 정월 초삼일 자정에 동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은 고성인 남세지 공이 어렸을 때 모친 이천서씨가 서울로부터 이곳에 정착할 즈음 불과 몇 가구로 마을 형성의 시작이었다고 하니 1505년 (연산군 11)이다. 이 마을의 기록을 따라 역사적으로 올라가 보면 입향조 남세지 공이 서울을 떠나 이곳 깊은 산골로 은거한 것은 연산군이 친어머니인 윤 씨 폐비 사건에 관련된 신하들을 학살했던 갑자사화의 화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에 조선 국왕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돼 많은 신하(선비)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이렇듯 영동의 상촌면에 수산리마을이 형성된 시기가 1505년이라는 기록을 보면 마을에서 흙돌담을 쌓기 시작한 지도 520년이 넘었을 것이다. 느티나무가 600년 됐다고 전해지는 것도 마을이 형성될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흙돌담과 느티나무 역사도 맞는 추정이 아닐까.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