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 김한종 의사 가문의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

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5〉

2025-08-21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홍주의병에 참가한 부친 김재정 의사 도와 홍주의병으로 활동, 광복운동 도모
‘대한광복회’에 가입, 충청도지부장으로 대한광복을 이끌어가며 독립운동 전개
충청도지부 홍성·예산·천안·아산 등 설치, 170만원(지금의 100억) 군자금 모아
도고면장 처단사건 일경에 체포, 38세의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김한종 의사가 태어난 곳은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다. 

김한종은 충효의 전통을 지닌 사대부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곳인 생가지는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3호로 지정됐다. 생가지 넓이는 1018㎡이며, 사랑채와 안채 두 채의 초가집이다. 생가 옆에 독립운동가 일우 김한종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나라사랑과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자존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건립됐다.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 의사는 1883년 1월 14일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에서 태어나 1921년 8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올해(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해가 바로 순국 104주년을 맞는 해이다.

김한종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에서 소모관으로 활약한 김재정 의사의 아들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1900년 2월, 홍주의병에 참가한 부친 김재정 의사를 도와 홍주의병에 참가해 활동했다. 또한 1915년에는 박상진 등과 함께 대구에서 무장독립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 김좌진 등을 규합해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했는데, 김한종 의사는 대한광복단 전라·충청지부장으로 임명돼 각지의 부호들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독립자금을 거뒀던 인물이다.

■ 대한광복단 전라·충청지부장, 독립자금 거둬
1906년 5월, 의병들의 활약으로 홍주성을 되찾았을 때, 김한종은 아버지 김재정과 함께 홍주의병에 참여해 전투를 벌였다. 비록 홍주의병은 일본군에게 패했지만, 김한종은 당시 의병장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며 훗날을 기약했고,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이후부터 충청도 지역에서 나라를 회복하는 운동을 다시 시작한다.

김한종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동지들을 모으며 광복운동을 도모했다. 1916년 7월에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일본 총독이 부여를 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다. 김경태, 김재창과 부여의 이철영 집에서 거사를 모의하던 중 낌새를 눈치챈 일경의 가택 수색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결국에는 암살계획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한종은 박상진을 만나게 되면서 운명이 바뀐다. 광복회의 주요 인물인 채기중이 김한종을 박상진에게 소개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의 조직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다. 1915년 광복회를 결성한 박상진은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에서 권총을 들여오다 발각돼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다. 박상진은 정미의병 당시 12도창의군 총대장을 맡았던 의병장 허위의 제자였다. 허위는 1908년 일본 헌병에 체포돼 순국한 경성감옥 1호 사형수였다. 나이는 김한종이 한 살 위였지만 유학적 세계관과 외세 배격, 조국 독립, 무장투쟁 노선 등 생각과 소신이 비슷했다. 박상진의 권유로 김한종은 1917년 6월 혁명적인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충청도 지역 지부장으로 임명됐다. 이때부터 김한종은 박상진, 채기중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이끌어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김한종은 1917년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서울 어재하의 집에서 김좌진을 만주에 부사령으로 파견했다. 당시 김한종은 “서로 (일제를) 크게 이겨, 만날 때 큰 외침이 있으리라”는 송별 시(詩)를 짓기도 했다.

김한종은 박상진과 함께 경상북도 부호들에게 “피눈물이 샘솟아 조국을 회복하려는 마음을 금할 길 없어 본회(광복회)를 만들었다”며 “각 자산가는 미리 저축하였다가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고, 만약 우리 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정률이 존재함을 알게 하겠다”는 포고문을 작성, 배포했다. 채기중과 함께 경북 안동의 권준흥의 집에 가서 300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한편 김한종은 충청도지부를 홍성, 예산, 천안, 아산 등에 설치했고, 친척들을 포함한 과거 의병 동지들을 모아 대한광복회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김한종은 우선적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친분이 두터웠던 장두환을 영입해 천안과 아산을 맡기고, 김한종도 예산과 홍성, 청양 등지에서 회원을 모집했다.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김한종의 자택은 충청지부 본부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김한종의 문중 사람과 홍주의병 참가자를 비롯해 농민과 미곡상 등도 합세해 군자금도 모금했다. 비밀리에 부호들에게 배당금 통고문이나 고시문, 경고문을 보낸 뒤 돈을 받아냈다. 김한종의 주도로 충청도지부에서 문서를 작성해 발송했으며, 상당한 규모의 군자금을 거둬들였다. 광복회 회원 김재풍·김상준으로 하여금 홍성 광천의 정인교에게 100원을 수령하도록 했다. 역사에 의하면 당시 170만 원, 지금의 100억 원 정도의 군자금이 모였다고 한다. 


■ 친일 부호들에 대한 처단, 군자금 모금
김한종은 이런 활동 중에 1917년 말에서 1918년 초 한반도에서 놀랄 만한 사건을 벌이는데, 바로 친일 부호들에 대한 처단이었다. 

1917년 11월 박상진으로부터 권총을 받아 채기중에게 전달, 당대 10대 부호인 친일인사 장승원을 처단토록 했다. 장승원은 경북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 통정대부와 청송군수를 거쳐 의병장 허위의 추천으로 경북관찰사가 됐다. 관찰사는 요즘으로 말하면 도지사로 상당한 고위직이었다. 장승원은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약속했던 군자금을 대지 않았고, 일제에 고발까지 한 인물이었다. 광복회 회원들은 장승원의 집에 침입, 유창순은 망을 보고, 채기중과 강순필이 권총을 쏘아 죽였다. 이들은 장승원의 집에 “조국 광복은 하늘과 사람의 뜻이 같다. 이 큰 죄를 성토하여, 우리 동포를 경계하고자 한다. 경계하는 사람 광복회원”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날이 1917년 11월 10일이다. 

또한 1918년 1월에는 일본 헌병에게 군자금을 모금한다는 문서를 넘겨준 악덕 지주인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을 직접 명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김한종은 회원들에게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아 이를 헌병에게 넘겼을 뿐 아니라, 부하 면서기 가족을 걸식하게 만들었고, 또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인데 광복회에 찬성하지 않고 또 의연금(군자금)을 내놓지 않으니 죽여서 다른 사람을 위엄을 보이라”고 말했다. 광복회 회원 김경태와 임봉주(임세규)가 도고면 신유리 박용하의 집에 침입, 사형선고문을 전달한 후 권총으로 쐈다. 박용하는 1918년 1월 24일 총을 맞고 숨졌다. 대담하게도 이들을 죽인 조직은 사형선고문을 전달한 뒤 권총으로 쏴 죽이고 광복회 이름의 경고문까지 남겼다. 이른바 ‘대한광복회’ 사건이다.

그러나 박용하를 처단한 이후 김한종의 조직이 겉으로 드러나게 됐고, 충청도 지부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김한종 의사가 참여해 활동한 항일독립운동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이다. 김한종의 항일독립운동은 광복회 가입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김한종이 주도한 도고면장 처단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면서 결국 김한종의 짧은 생애가 끝나지만 무엇보다도 ‘대한광복회’도 와해됐다는 점이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항일운동단체이다. 창립 목적은 조국광복으로 만주에서 군사를 양성해 국내에 진입, 일제와 독립항쟁을 벌이는 것이 었다.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 부호를 처단했으며, 만주에 사람과 자금을 보내 독립군 양성을 추진했다.

4년간의 옥고를 치르며 수많은 고문을 받은 김한종은 결국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가슴에 묻은 채로 38세의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의병운동에 투신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고, 이후 1910년대에는 점차 근대적 민족주의 이념을 수용,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특히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던 암흑기에 폭력혁명적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대다수 민중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표출했다. 마지막으로 대한광복회의 의열 투쟁 방식은 이후 암살단, 주비단, 의열단, 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져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한편 김한종 의사의 생가 옆에 독립운동가 일우 김한종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김한종의사기념관’은 김한종의 강직함을 현대로 끌어 오기 위한 요소를 배치하는 등 당시의 시대 상황과 국민들의 심정을 느끼고 되새길 수 있도록 했다. 지난 2007년 11월 2일 개관한 기념관은 광복관, 정려관, 일우관, 모현관으로 구성돼 있다. 광복관에는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의 활동상과 동지들의 유품이 전시돼 있으며, 정려관에는 김한종 가문의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와 두 효자의 효행 내용이 전시돼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