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서 나무처럼 산다는 것
백석의 시 <흰 바람 벽이 있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이 실은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이라니. 놀라운 전환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지복의 성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석이 짧은 문구로 이것을 표현했다면,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근현대사의 끊임없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물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가장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가 모든 위로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지복(至福)의 성자’가 될 수 있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이 태어날 수 있을까? 상처, 억울함, 고통이 모두 모이는 묘지와 같은 곳이 잔나트(천국)가 될 수 있을까?
누구나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절망 안에서 희망이 태어난다고, 사랑과 슬픔은 원래부터 한덩어리라고, 묘지는 유서 깊은 두엄구덩이라 그 송장거름으로 나무가 더 잘 자랄 거라고.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구체성을 가졌을 때에야 진짜 의미가 있다. 깊이와 폭을 동시에 가져야 하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 장편의 분량이 필요한 이유다.
이 소설에는 그게 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히즈라 ‘안줌’이라는 인물이 자기 정체성의 고민, 구자라트 폭동, 인도-카슈미르 분쟁, 카스트 제도,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분쟁 등의 질곡을 통과하며 무수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묘지를 잔나트로 바꾼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전환의 과정이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건 다시 말하지만, 과정 자체가 너무나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실제인 것만 같은 인물들의 사정과 그들의 내면을 다루는 작가의 깊이와 표현,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완전한 내부자가 된 듯한 시선, 약자의 입장에서 바라는 자유와 평등이 이 소설엔 있다.
백석이 언급한 것들에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모여 사는 인물들을 모두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쓸쓸하진 않다. 혼자가 아니니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쇼핑몰’은 소 사체를 치우는 카스트의 사람이 소를 죽인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곳 위에 세워졌다. 깔끔하고 세련된 포장 위에서 지하의 일은 더 이상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이 ‘어쩌면 온 세상의 묘일 수도’ 있다. ‘마네킹을 닮은 쇼핑객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 사려고 하는 유령들’이고.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묘지는 죽음이 모이는 곳이다. 규정되지 못하고, 등록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다치고 죽은 이들이 모이는 곳.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이들이 모이는 세상 밖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지하에는 역사에서 숱하게 그와 비슷한 일로 고통을 받았던 이들의 주검이 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미 흙과 함께 썩고 문드러져 구별할 수 없게 된.
나무는 지상을 떠나지 않는다. 본인이 선택한 운명인지 아닌지, 결코 떠나지 않고 뿌리를 내린다. 콘크리트 바닥을 바닥인 줄 알고 별을 별대로 두지 않는 인간들에게는 참 미련해 보일지 모른다. 뿌리를 내린다는 건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지하에 아무도 모르게 이름 없이 묻혀있던 이들을 호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과 인생에 구체적으로 호응할수록 뿌리는 더 깊고 넓게 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아래로 뿌리를 내린 만큼 위로 뻗는다. 그 모양새대로. 이건 정직함이다. 사람과는 달리 몸으로 아는 만큼, 겪은 만큼만 드러내 보인다.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좋은 말들 사이에서 붕붕 떠다니기만 하는 유령 같은 삶. 진짜 말다운 말, 이야기다운 이야기, 진실다운 진실을 말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몸이 필요하다. 나무와 같이 구체적인 몸이.
모두가 지구 전체를 끌어안을 수 있는 모성(母性)의 세계수가 되진 못할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소박한 나무 하나 정도 될 수 있다면.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