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자락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공주 상신리 돌담마을
충청문화유산 재발견, 옛담의 미학-돌담이 아름다운 마을〈11〉
공주 반포면 상신리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동천(洞天)’ 즉, 하늘만 보이는 신령한 마을이라 불릴 만큼 고즈넉한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사동천’ 또는 ‘동천마을’이라고도 불리며, 유성 지역 사람들이 갑사나 경천장으로 향할 때 지나던 고갯길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랜 교통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계룡산의 장군봉은 전설에 따르면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산신에게 개국의 소원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그 산봉우리를 ‘임금봉’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마을 뒤편의 솥봉(가마봉)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옛날 한 석공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갑작스레 죽자 아내와 가족은 산에서 나물과 땔감으로 의지하며 살아갔다고 한다. 그러다 인근 고을 원님에게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아내의 원혼은 산에 남아 큰 울음을 울었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산 중턱에는 ‘사람바위’ 또는 ‘아내바위’라 불리는 기이한 바위가 생겼고, 그 산이 ‘솥봉’이라 불리게 된 유래”라고 전해지고 있다.
상신리 마을에서는 지금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리제(大月祭·풍물굿 중심의 마을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는 마을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이장이 제주를 맡고 대보름 새벽에 풍물굿과 유교식 제례가 혼합된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전한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고려 시대의 절터인 구룡사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이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과거 절에서 깃발을 건 당간(幢)을 세웠던 기둥 역할을 했던 유물이다. 마을의 상징적 석물인 선돌(입석)에는 ‘상신리 자연의 춘하추동은 무릉도원의 세월’이라는 구한말 선비 권중면의 음각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찬탄한 정신적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 자연석 강돌로 쌓은 상신리마을 돌담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마을은 일명 ‘돌담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상신리는 땅에서 돌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집집마다 자연석 강돌로 쌓아 만든 돌담이 이어져 있어 ‘돌담마을’로 불린다. 돌담은 단단하면서도 촘촘하게 쌓았으며, 이것이 마을의 깊은 역사와 전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되고 있다.
상신리마을은 계룡산의 품 안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로 땅만 파도 돌이 나올 만큼 ‘흙 반, 돌 반’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돌이 풍부한 이곳은, 집집마다 주변에서 나오는 자연석 강돌을 이용해 촘촘하게 돌담을 쌓아 고유한 우리네 옛 마을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소박하고 낮은 돌담은 경계를 구분하는 단순한 구조물에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생활문화유산이자 마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을 곳곳에 이어진 돌담은 단순한 경계나 담장의 기능을 넘어, 마을의 정체성과 고유한 예술적 미감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통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돌담 풍경은 우리나라 농산촌 마을의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정서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주거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의 마을로 꼽히는 곳이다.
얼마나 돌이 많았는지 땅만 파면 돌이 나왔다고 한다. 산이고 밭이고 ‘흙 반 돌 반’일 정도로 돌이 많이 나와서 텃밭까지 돌로 담장을 두를 정도다. 논밭을 개간하면 쌓이는 것이 돌무더기여서 자연석 강돌들을 가져다가 돌담을 쌓아 올리면서 구불구불 돌담장으로 만들어진 것이 상신리 돌담마을의 유래다. 쌓은 방식도 흙을 이용하지 않고 강돌만을 이용해 돌과 돌의 귀를 잘 맞추며 튼튼하고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폭도 1m 남짓 넓지 않을 정도로 큰 돌은 밑부분에 깔면서 위로 갈수록 점점 작은 돌이나 편평한 형태의 돌을 중간중간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크고 작은 돌들이 불규칙적으로 쌓여 있는 것 같지만 일정한 간격과 균형,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의 돌담은 여느 곳의 돌담들과는 조금 다르다. 돌담의 높이가 사람 키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경계만 구분 짓는 정도로 집안을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소탈하고 인간적이라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의 돌담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따뜻하고 친근하다고까지 말한다.
또 상신리 마을에서는 곳곳에서 장승을 만날 수 있는데,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에 솟대를 같이 세워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와 재액을 막던 풍습이 전통문화로 남아 돌담과 함께 도시인들에게 특별한 흥미를 전해주고 있다. 상신리마을의 장승들은 특히 표정이 풍성하다고나 할까. 볼까지 축 늘어진 눈꼬리와 귀밑까지 찢어진 입 사이로 드러난 뻐드렁니, 툭 불거진 볼의 표정 등 해학이 넘치고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어 마을 어귀에서 잠시 머물며 구경해볼 만한 풍경이다. 상신리 마을은 계룡산 철화분청으로 유명한 조선 시대 도요지 인근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계룡산 도예촌과도 이웃해 도예 체험을 할 수도 있다.
■ 돌담, 삶이 공존하는 전통의 문화유산
상신리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사동천(寺洞天)’ 또는 ‘동천마을’이라고 불려지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계룡산 장군봉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 산신께 개국을 기원했다’는 전설이 얽혀 있으며, 뒤편의 솥봉(가마봉)에는 억울하게 죽은 석공의 아내가 원혼으로 울다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설화와 전승은 마을이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전통과 신앙이 어우러진 정신적 터전임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흔적도 뚜렷하다. 마을 입구에는 고려 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구룡사의 흔적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또한 마을의 상징인 선돌(입석)에는 구한말 은둔 선비 권중면이 새긴 ‘신야춘추 도원일월(莘野春秋 桃源日月)’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이는 ‘상신리의 사계절 풍경은 무릉도원의 세월과 같다’는 뜻으로, 이 마을이 단순한 농촌마을이 아닌 선비문화와 은거의 전통을 간직한 공간임을 알려주고 있다.
민속신앙의 흔적도 곳곳에서 확인되는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는 수호신 역할을 해온 장승과 솟대가 서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정월 대보름이면 거리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해왔다. 특히 상신리마을의 장승은 해학적인 표정으로 유명해 방문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상신리 돌담마을은 전통마을, 단순한 유적지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는 현대적인 관광과 체험 마을로도 거듭나고 있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농촌체험휴양마을센터에서는 된장·간장·청국장 만들기, 농산물 수확 체험 등 전통 생활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또한 마을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집안에 장독대가 보이고, 계절마다 피어나는 접시꽃과 채송화, 감나무와 살구나무가 조화를 이뤄 도시민들에게는 특별한 힐링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 뒤편의 계룡산 자락에서는 가벼운 트래킹이 가능하며, 인근 계룡산 도자예술촌과 연계해 도예 체험과 문화 여행을 함께 즐길 수도 있다. 이처럼 상신리 돌담마을은 고려 시대 불교문화, 구한말 선비의 흔적, 민속신앙, 전통 주거문화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유서 깊은 공간이자,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체험형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는 마을이다.
결국 상신리마을의 돌담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돌담 사이로 스며든 역사와 전설, 소박한 농산촌 마을의 정서는 오늘날에도 방문객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하고 있으며, 한국 농촌문화의 정수, 충청지역의 문화와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마을이다. 이처럼 상신리 돌담마을은 전통문화와 현대 관광이 어우러진 대표적 사례로, 앞으로도 보존과 활용이 조화롭게 이어져야 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