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선사의 고향, ‘홍주면 옥동’과 ‘결성 박철마을’

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7〉

2025-09-11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사람은 많으나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니라. 의리를 저버리고 지조를 변한 사람은 의식 불구자요, 자주정신을 망각하고 민족을 반역한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

일제에 정신을 팔아먹은 변절자들을 향한 만해의 질타는 이토록 추상과도 같았다. 비록 나라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바친 만해에게 돌아온 것은 죽을 때까지의 가난과 고독과 핍박이었지만 만해 선사의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불멸로 이어지는 위대한 민족정신을 남겼으니 그것이 곧 만해의 부처요, 만해의 중생인 ‘님’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의 만해 한용운의 사생관은 말과 행동이 똑같이 서릿발처럼 차갑고 매서워 한평생 ‘님’을 향한 그 지조와 기개가 변할 줄 몰랐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1879년(고종 16년, 음력 7월 12일) 8월 29일에 충청도 홍주(洪州)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지금의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청주 한씨(淸州韓氏) 응준(應俊)과 온양 방씨(溫陽方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이 홍주(洪州)는 맞는데, 명확한 장소에 대한 이설(異說)이 존재하고 있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이며, 자는 정옥(貞玉)이었다. 만해(萬海·卍海)는 입산한 뒤의 법호요, 법명은 용운(龍雲)으로 건봉사 만화 선사(萬化禪師)의 제자가 됐을 때의 법명이다. 김연곡(金連谷) 화상으로부터 수계 시의 계명은 봉완(奉玩)이었다. 뒤에 환속해서는 성북학인(城北學人)·목부(牧夫)·실우(失牛) 같은 아호를 쓰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의 증조부 광후(光厚)는 정이품 무관직인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조부 영우(永祐)는 종사품인 훈련원첨정을 했으며, 부친 응준(應俊)도 종오품인 충훈부도사를 지낸 몰락한 양반, 즉 잔반의 신분(사족 계급 출신)이었다. 이로 미뤄볼 때 만해의 굽힐 줄 모르는 불같은 성품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무골 기질에서 연유됐는지도 모른다.


■ 홍주가 낳은 위대한 인물 ‘만해 한용운’
지금의 홍성 사람들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를 사육신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더불어 이 고장 홍주(洪州)가 낳은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생전에 자신의 출신 내력에 대해 밝힌 적이 없으므로 유년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몸집은 작았으나 어렸을 적부터 힘이 세고 담력이 컸으며 또한 총명이 비상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한용운은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매우 빨라서 ‘동몽편’과 ‘소학’을 금세 떼고 편년체의 중국 역사서인 ‘통감’까지 독파했으며, 일곱살 때에는 사서삼경까지 두루 섭렵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 무렵 홍성읍내인 홍주면 오관리로 나와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과 동양고전을 배웠다. 한학에 정진한 뒤로는 서당의 숙사(塾師)가 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한용운은 열여덟 살이던 1896년 2월 10일 당시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열일곱 살이던 홍주면 학계리 출신의 천안 전씨(天安全氏)인 정숙(貞淑)과 부모가 결정한 혼인을 했다. 이들 사이에서 만해가 출가하던 해인 1904년(광무 8) 12월 21일 아들 보국(保國, 1904~1976)이 태어났다. 한보국은 1940년(소화 15) 7월 26일 홍주면 내법리 출신의 강창옥과 결혼했다. 한보국은 1904년 12월 21일생이고, 강창옥은 1917년(대정 6) 1월 3일생이다. 한보국은 1940년 홍주면 옥동에서 철물점을 경영했다. 철물점 운영은 강창옥이 주로 했고, 한보국은 대외 활동을 주로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보국은 1946년 3월 18일 어머니(전정숙)가 작고할 때까지 홍성에서 모시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보국은 고향에서 신간회 활동을 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5년 해방 시기에 홍성군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했다. 이후 내외는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고, 손녀 다섯이 거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보국은 1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어려서 죽고 셋째 딸인 명심 씨가 2001년 말에 북한 잡지 ‘통일신보’에 기고를 하면서 만해의 손녀 다섯과 후손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게 알려졌다. 한보국은 197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강압과 불교계를 비롯해 조선 사회의 친일 예속화를 지켜보면서 자신을 지키는 의지처로 가정(여성)을 동경하기에 이르렀다. 오래전부터 ‘승려취처론(僧侶娶妻論)’을 주장해 왔던 터이고 ‘불교유신론’에서도 승려의 결혼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혼을 택하게 됐다.


■ ‘한용운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시대 10년’
만해는 서울에 머물면서 지인들과 어울리며 속계와 불계(佛界)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초계율적(超戒律的)’이어서 술집을 찾곤 했다고 한다.
 
그즈음 단성사 옆에 개업해 자리하고 있던 ‘진성당(進誠堂)’ 병원장인 여의사 정자영(鄭子英)의 어머니인 김씨는 독실한 보살이었다고 한다. 당시 돈암동에 살았던 정자영은 1921년에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로 유숙원과는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으로, 만해의 딸인 ‘한영숙(韓英淑)’의 이름도 정자영(鄭子英)의 이름에서 ‘영(英)’자를 따고 엄마인 유숙원(兪淑元)의 이름에서 ‘숙(淑)’를 따서 만해가 딸의 이름을 ‘영숙(英淑)’이라고 지을 정도로 각별했던 사연을 ‘한영숙(韓英淑)’ 본인이 직접 밝히기도 했다.

정자영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도인데 선학원에서 ‘만해가 아내를 얻을 생각이 있다’는 것을 적음스님으로부터 듣고 둘을 중매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자영의 어머니는 만해의 열정적인 법문과 독립정신에도 크게 감명받고 있었는데, 당시 이 병원에서 16년 동안 일하고 있던 서른여섯 살의 충남 보령 출신의 유숙원(兪淑元)이라는 간호원이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고, 유숙원 본인도 혼인을 포기하고 간호원으로 직장생활을 마칠 생각이었다고 한다. 당시 유숙원의 집은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고, 유숙원의 작은아버지가 계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친구인 정자영 원장의 어머니인 김씨의 설득으로 결국 만해는 유숙원과 두 번째로 결혼을 하게 됐고, 혼례식은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만해는 벽산 스님,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등 지인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집을 짓고 있을 때인 1933년의 일이다. 

한용운은 유숙원과 함께 돈암동의 신흥사에 가서 우물에서 정화수 한 그릇을 떠다가 대웅전 법상에 올려놓았고, 이어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켰으며 삼배(三拜)를 함께 마치고 서로 절을 하고 절을 받으면서 화촉을 밝혔다고 한다. 1933년 겨울 성북동의 신거생활(新居生活)을 시작으로 이른바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 시대 10년’ 동안의 마지막 삶(1944년 6월 29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이 이뤄졌던 셈이다. 정부는 1962년 한용운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만해의 혈육은 뒷날 재혼한 부인 유숙원(兪淑元, 1898~1965)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한영숙(韓英淑)이 유일하게 남아 남편과 함께 만해가 만년에 기거하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성북로29길 24 (성북동), 1984년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됐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지정)’을 지켰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딸 한영숙(91)에게는 2남 1녀가 있으며, 현재 대전시 유성구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심우장’을 떠나지 않았고,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행보를 걸었다는 사실이다. 한때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내가 아는 육당(최남선의 아호)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러버렸소”라며 만나지도 않았으며, 일제 형사가 찾아왔을 때는 호통을 치며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며 ‘보내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다가 해방 1년 전인 1944년 ‘심우장’에서 사망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