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천안 ‘독립기념관’

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8〉

2025-09-18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올해는 광복절 80주년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자 아름다운 자연과 현대적 시설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하늘 아래 편안한 땅’ 충남 천안(天安)이다. 천안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역사 교육의 현장인 독립기념관이 대표적이다. 천안 지역은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며,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병천 아우내장터 3·1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해 유관순 열사, 석오 이동녕, 유석 조병옥,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이 바로 천안(天安)이다. 우리나라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의 정신사적 상징인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이 ‘하늘 아래 편안한 땅’ 천안(天安) 목천의 흑성산 아래 기슭에 세워져 있다.

■ 천안 독립기념관, 민족의 자주독립 ‘성지’
올해로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이 된 지 80년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한 지 106년이 넘었다.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천안군 목천읍에 있던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이 학교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천안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이었다. 이어 3월 20일 입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여자학교인 광명학교 교사를 비롯해 학생 10여 명과 직산광산 광부, 인근에 있던 주민 등 70여 명이 양대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입장장터로 향했을 때는 그곳에 있던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7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으레 3·1독립만세운동하면 유관순 열사와 아우내 장터를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천안은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이러한 연유로 천안(天安)에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이 세워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복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겨레의 전당이다. 국민운동으로 추진돼 지난 1987년 8월 15일에 개관했으며,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을 세우자는 논의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일어나 1946년 천도교회관에서 사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 독립기념관 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과,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주최 ‘광복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정식 안건으로 토의·합의해 정부에 건의한 바도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에 실린 식민지 서술 부분이 한국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이에 한국 국민이 국민운동으로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정부에서는 소요 부지인 400만㎡을 매입, 제공했다. 이에 국민성금 490억 2432만 5009원(1986년 4월 8일 기준)을 모금하는 한편, 국내외로 독립기념관에 전시할 자료와 유물을 수집했다. 1986년 4월 8일 ‘독립기념관법’이 국회를 통과해 그해 5월 9일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1986년 8월 15일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그해 8월 4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1년을 늦춰 개관했다.

천안 목천읍 흑성산(해발 495m) 남동쪽 언덕에 있는 독립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리는 중요한 장소이며, 성지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나는 새의 날개처럼 활짝 편 채 솟아오른 겨레의 탑이 눈앞에서 압도한다. 높이가 무려 51m로 웅장하다.

독립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겨레의 집이다. 반듯하면서도 웅장한 기와집으로, 독립기념관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 아우내장터, 3·1 독립만세운동의 성지
독립기념관의 내부는 넓은 기념 홀로 독립기념관의 관람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심에는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과 강인함을 표현한 ‘불굴의 한국인 상’이 힘차다. 7개의 전시관과 MR 독립영상관, 홍보관과 체험관으로 이뤄져 있다. 제1전시관(겨레의 뿌리)은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과 국난 극복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제2전시관(겨레의 시련)은 1860년대부터 1940년대, 즉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를, 제3전시관(나라지키기)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구한말의 국권 회복 운동을 주제로, 제4전시관(겨레의 함성)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을, 제5전시관(나라 되찾기)은 일제강점기에 조국독립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제6전시관(새나라 세우기)은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민중의 항일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제7전시관(함께하는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조국광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전개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체험전시관이다. 이밖에도 본관(겨레의 집)과 입체영상관이 있고, 야외에는 독립운동사의 중요 인물과 단체들의 어록비(語錄碑)와 각종 조각물이 있어 독립기념관에 걸맞는 환경으로 다듬어져 있다. 

특히 광복 50주년인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나온 부재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 전시한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독립기념관 주 건물인 겨레의 집 서쪽 해가 지는 방향에 조성해 일제 식민 통치의 몰락과 식민잔재 극복·청산을 강조하는 한편 총독부 중앙 첨탑 부분을 지하 5m 깊이로 반 매장해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배치했다. 이곳 ‘독립기념관’에는 10만여 점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보존되고 있는 독립운동의 성지다.

독립기념관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인 목천읍 동리마을에는 ‘석오 이동녕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의장을 지낸 이동녕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곳이다. 친필 서신, 임시정부 문서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돼 있어 독립운동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왜가리 서식지로 유명한 와우산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소박한 생가 옆으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고향집 앞마당에 한적하게 앉아 있는 이동녕 선생의 좌상이 반긴다.

독립기념관에서 10㎞ 정도 떨어진 병천면에는 ‘유관순 열사 유적’이 있다. 유관순 열사는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유적은 열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열사의 동상과 초혼묘 봉안기념비, 추모각 등을 갖췄다. 기념관에서는 열사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어 역사 교육의 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유적지에서 유관순 열사 생가는 가깝다. 용두리 마을 입구에 생가와 다니던 매봉교회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매봉교회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가 이화여자고등학교 창립 80주년을 맞아 재건립됐다.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열사의 생가, 아우내 장터가 있는 곳, 천안의 독립만세운동은 목천에서 시작됐다. 3월 29일에는 천안읍내에서 3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소리를 외쳤다. 4월로 접어들면서 대대적으로 확산됐고, 4월 1일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은 천안독립만세운동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금의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명의 장꾼들이 대한독립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유관순과 유중권 등이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했으며, 시위대는 장터를 이리저리 오가며 독립만세의 함성을 높였다. 아우내장터의 독립만세운동으로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유관순, 조인원, 유중무가 3년 형을, 김용이. 조병호 각 2년 6개월, 김상훈. 백정운이 1년 6개월, 조만영, 박제석이 8개월, 김교선, 한동규, 백이하, 이순구가 2년형 을 언도 받았다.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결과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법정 모독죄가 추가돼 7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 끝에 눈을 감고 말았다. 천안의 3·1독립만세운동은 ‘독립기념관’을 목천에 세우도록 한 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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