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주도한 애국자 길러낸 곳, 옛 백제의 수도 ‘공주’
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0〉
충남 공주는 일반적으로 옛 백제의 수도인 역사·문화·교육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 공주는 찬란했던 백제의 과거 역사유적과 함께 행정도시, 교육도시로 문화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고장이다.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가기까지 도청소재지였고, 개화기부터 다양한 학교가 설립돼 충남과 대전지역 교육을 선도해 왔다. 공주사범대(현 공주대학교)와 공주교육대학이 있어 외지에서 유학을 와서 하숙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공주의 구도심을 가로지르는 근대문화유산 탐방길은 공주시민들이 근·현대 격동기를 지나며 인재를 양성하고 일제에 항거해 온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탐방로에 자리한 종교시설과 학교들은 근대교육의 산실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자들을 길러냈다. 이렇듯 공주는 일제강점기 충청지역 독립운동의 진원지였다. 그 중심엔 영명학교가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의 두 기둥은 신앙과 애국이었다. 언덕 위 교정에서 공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10대 초반의 유관순 열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유관순의 자취 어린 영명학교와 제일교회
충남역사박물관 뒤쪽 언덕 위에는 3·1만세운동 하면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와 인연을 간직한 영명중·고등학교와 3·1중앙공원이 있다.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병천 아우내 만세운동과 이화학당, 서대문형무소 등을 기억하는데 어린 시절 공주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영명중·고등학교 교문 옆에 자리한 3·1중앙공원은 앵산(櫻山)공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자 앵(櫻)은 벚꽃을 의미하는데 지역 인사들은 충남역사박물관과 이곳에 벚나무가 많이 있어 그렇게 불렸던 것으로 추측한다. 공원 한가운데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산 뒷면에는 유 열사의 생애와 유 열사를 교육으로 인도한 선교사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의 생애가 기록돼 있다. 사애리시는 천안에 살던 열한 살 소녀 유관순을 공주로 데려와 1914년부터 2년간 영명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1916년 이화학당에 추천해 서울유학길을 열어 주었다.
선교사 사애리시는 1904년 영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명선학당(영명여학교)’을 설립하고 여성 교육을 실시했다. 공주영명학교는 사애리시 부부의 후임으로 파견된 선교사 윌리엄(한국명 우리암)이 1906년 설립했다. 이때 명선학당은 영명여학교로 개칭하고 1932년 남녀공학으로 개편됐다. 영명중·고등학교 내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탑에 유 열사의 흉상이 세워진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00주년 기념탑 앞 커다란 나무에 자리한 공주역사전망대에는 아크릴판에 옛 공주시가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영명중·고등학교에서 기독교박물관으로 가는 길 벽면에는 공주읍 만세운동의 기록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공주읍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주축이 돼 고종황제 국장이 거행된 지 한 달째이자 공주 장날인 4월 1일 열렸다. 타일로 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벽면에는 우리말로 풀어 쓴 독립선언서가 적혀 있다.
옛 제일교회 건물이 지금은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공주제일교회는 공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다. 제일교회는 공주지역 기독교 활동의 중심지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공주지역 청년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신간회운동에 참여했으며, 강연회와 약학회 등을 통해 신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공주제일교회는 1903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맥길이 설립했다. 건물은 1931년 한국 초기 교회 양식을 띠고 세워졌다. 6·25 한국전쟁 때 건물 상당 부분이 파손됐지만 신축을 하지 않고 복원함으로써 건립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특히 개축 당시의 종탑 일부의 타일 처리, 증축 당시 장식된 화가 이남규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로마 시대의 카타콤을 연상시키는 반 지하층의 개인 기도실 등은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어 2011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공주제일교회는 충청지역의 선교 거점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으로 유관순 열사와 조병옥 박사가 이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교회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근대화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또한 공주는 충남의 역사적 중심지로 ‘독립운동기념관’이 위치해 있으며, ‘공주 유관순기념관’은 한국 독립운동의 아이콘으로,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공주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이곳에서는 유관순의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유관순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다양한 시민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독립운동가 이관직·여성 교육의 사애리시
공주의 ‘독립운동가 이관직’은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에서 태어나 애국계몽운동, 무장독립투쟁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용(穉用), 호는 해관(海齧)으로 1900년(고종 37)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3년 뒤인 1903년(고종 40) 졸업한 후 육군 보병 참위, 1907년(고종 44)에는 육군 보병 부위에 임명돼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근무했다. 1907년 8월, 한일신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인재양성을 위해 경북 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해 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국권피탈 이후인 1910년 9월에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합한 지역을 물색하기 위해 이회영·이동녕 등과 함께 정착지 선정 활동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11년, 삼원보에 한인들의 자치기구인 경학사와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무관양성기구인 신흥강습소를 창설했다.
이관직은 이동녕·이광·김창환 등과 함께 군사 교관이 돼 직접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등 무관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1916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귀국했으며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배재학당의 학생 동원 책임자로 활동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인 공주로 돌아와 광정성결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72년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항일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또 한 사람, 근대 여성 교육의 어머니 사애리시(1871~1972, Alice H. Sharp) 선교사는 1903년 31세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후 1940년 일제로부터 강제 출국을 당할 때까지 38년간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사와 교육자로 활동했다. 남편 로버트 아서 샤프(1872~1906, Robert Arther Sharp) 선교사는 서울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이사로 활동하고,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다 1904년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됐다. 사애리시 선교사와는 이듬해인 1905년 결혼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5년 가을 충청도 최초의 여학교인 ‘명선여학당’(현 영명학교)을 공주에 설립,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등 많은 여성을 교육으로 일깨우고 여성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헌신했다. 특히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아 1914년부터 2년간 영명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화학당에서 교육받도록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독립운동가 김현경, 광복 후 자유당 정부에서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 최초의 여자경찰서장을 지낸 노마리아, 최초의 여성 목사 전밀라 등 많은 여성 인재가 영명여학교에서 사애리시의 가르침을 받아 한국의 여성사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명선여학당은 중등교육을 목표로 하면서도, 교육과 거리가 먼 여성들을 연령이나 능력에 관계 없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1906년 남편 샤프 선교사가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티푸스로 별세하자 충격을 받고 한국을 떠났지만, 남편이 묻힌 공주가 그리워 1908년 다시 공주로 돌아와 명선여학당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영명여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 시설과 교원 보충 등 공주지역에서 근대교육의 틀을 구축했다. 공주와 충남 지역에는 20개가 넘는 교육기관을 세워 많은 여성 인재를 양성했다. 강제 출국 후에는 말년을 미국 파사데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지내다 101세의 나이에 소천, 파사데나 납골묘원에 안치됐다. 공주 영명학교 내에는 1938년 사애리시 선교사의 활동을 기념하는 ‘사애리시 선교 기념비’가 건립됐으며,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과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의 만남을 기념한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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