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군 인구 4만 3000명, 가장 적은 용화면 인구 890명
지방소멸 인구감소시대, 충청의 마을공동체 소멸위기 현장을 가다〈15〉
영동군 인구 1965년 12만 4075명 정점, 올해 6월 말 4만 3050명
인구 가장 적은 용화면 올 6월 말 기준 890명, 출생아 수년간 0명
용화면 여의리마을 67명, 65세 이상 고령자 61%를 넘어서고 있어
용화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 용강리마을 60명, 고령자 67%
충청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영동군(永同郡)은 남한의 중앙으로 동쪽은 경상북도 김천시·상주시, 서쪽은 충남 금산군과 남쪽은 전라북도 무주군에 북쪽은 충북 옥천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명산과 맑은 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많은 곳이다.
영동은 길동(吉同), 계주, 영산, 계산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영동으로 개칭한 지명으로 역사가 유구하다. 영동읍의 주곡천과 양정천을 이수(二水)라고 하고 두 개의 천이 합류해 영동천을 이루고 있는데, ‘이수(二水)’를 한 글자로 표기하면 ‘영(永)’자 되고 영동은 ‘이수(二水)’와 옛 이름 ‘길동(吉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동군은 영동읍과 용산·황간(黃澗)·추풍령(秋風嶺)·매곡(梅谷)·상촌(上村)·양강(楊江)·용화(龍化)·학산(鶴山)·양산(陽山)·심천(深川)면의 1읍 10면으로 구성돼 있다.
영동군 인구는 지난 1965년 12만4075명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이후 해마다 큰 폭으로 줄었고, 2008년 12월에는 5만 276명으로 떨어졌다. 2019년 6월에는 4만 9996명으로 사상 처음 인구 5만 명 선이 무너졌다. 이때부터 군이 주축이 돼 ‘인구 5만 명 회복 운동’을 펼쳤으나 회복보다는 감소 현상이 계속돼 지난 2022년 11월 말에는 인구 4만 5000명이 무너졌고, 올해(2025년) 6월 말 기준 총인구수는 4만 3050명(남자 2만 1674명, 여자 2만 1376명)이며, 세대수 2만 3618세대에, 세대당 인구는 1.82명, 남녀 비율은 1.01이다.
영동군은 인구가 계속해 감소하고 있는 인구 소멸지역이다. 영동군 1읍 10면 중에서도 가장 인구수가 적은 면은 용화면으로 올해 6월 말 기준 890명(남자 458명, 여자 432명)이다. 최근 3년 동안 용화면의 출생아 수는 한 명도 없어 ‘0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 영동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용화면 890명
충북 영동군 용화면은 고려 시대에 용화현으로, 내룡리와 용화리를 잇는 용강의 물줄기가 용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명이 유래했다. 조선 태종 13년 영동현에 편입됐고, 영조 35년 영동현 남이면 용화리가 됐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으로 개칭돼 창촌, 창동, 구백, 내룡, 조동, 안정, 홀계, 원당, 월전의 9개 동리를 관할했다. 이후 다시 상촌, 중촌, 조동, 안정, 원당, 홀계, 원전, 남악, 내룡, 창촌, 창곡, 상구백, 하구백의 13개 동리로 확장됐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남이소면의 황지, 중자작, 마도, 도덕, 하시, 상시, 하천, 수동, 평촌, 임정, 봉암, 미촌의 15개 동리를 병합해 초동, 안정, 월전, 용화, 자계, 용강, 여의, 도덕, 범화, 봉림의 10개 리로 개편해 관할했다. 1947년 3월 10일 도덕리, 범화리, 봉림리의 3개 리를 학산면에 넘겨주고 조동리, 안정리, 월전리, 용화리, 용강리, 여의도, 자계리등 7개 리를 관할하게 됐다. 1936년 월전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용화리로 옮겼고, 1989년 11월 15일 부지 477평(연건평 160.6평)의 청사를 신축했다. 현재 7개 법정리에 11개 행정리, 17개 자연부락을 관할한다.
용화면의 7개 법정리 중에서도 용강리가 60명(남자 31명, 여자 29명)으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이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37명(남자 18명, 여자 19명)으로 61%를 차지하고 있다.
이어 여의리가 67명(남자 35명, 여자 32명)으로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45명(남자 22명, 여자 23명)으로 67%다. 안정리는 68명(남자 32명, 여자 36명)이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32명(남자 10명, 여자 22명)으로 47%를 차지하고 있다. 또 조동리는 136명(남자 74명, 여자 62명)이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66명(남자 30명, 여자 36명)으로 48%다. 월전리는 145명(남자 69명, 여자 76명)이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78명(남자 32명, 여자 46명)으로 57%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150명이 넘는 자계리는 155명(남자 81명, 여자 74명)의 주민들 중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82명(남자 35명, 여자 47명)으로 52%로 나타난다. 용화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면 소재지인 용화리의 경우 259명(남자 136명, 여자 123명)이 살고 있는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120명(남자 62명, 여자 58명)으로 46%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용화면 여의리마을 67명, 용강리마을 60명
영동군 용화면 여의리(如意里, 河作洞, 아래자자기)마을은 본래 관성군 속현인 양산현(陽山縣) 지역으로 1313년 옥천군에 편입됐고, 조선 시대에는 옥천군 양남이소면에 속했다가 1909년 (광무10년) 영동군에 편입됐다. 마을 이름은 자자기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자자기 또는 하자작동이라 불리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여의티(如意峙)의 이름을 따서 ‘여의리’라 부르게 됐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했다. 자연마을과 행정리명 모두 ‘여의리’이다.
여의리(如意里)마을 자랑비에는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곳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동편으로 우뚝 솟은 갈모봉(葛冒峰)을 끼고 마을 우측으로 남대천 맑은 물이 전설처럼 흐르고 있어 훈훈한 고장의 인심과 아름다운 풍치의 조화를 더해 주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본디 천성이 착하고 근면하여 관내에 두루 모범적인 부락으로 알려져 왔으며 논농사 밭농사와 함께 인삼 포도 등 특용과수작물을 재배하여 땀흘려 일하고 얻는 수확을 보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 진입로 확 포장은 물론 99미터에 달하는 여의교(如意橋) 가설공사는 1976년 착공해 1978년 완공했고, 주민 모두가 횃불을 밝히는 철야 작업으로 장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마을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여의마을의 정신으로서 서로 상부상조하며 생활하는 공동체적 삶은 지금도 마을의 자랑으로 이어 오고 있다.’고 쓰고 있다.
여의리마을 입구에는 마을 안내판과 함께 마을비와 마을자랑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입구 삼거리 한편의 공원에는 마을안내판이 있다. 마을의 주산물과 집들을 그리고 세대주 이름을 쓰고 마을을 홍보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여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만난 김판옥 주민은 “이 동네는 남대천의 맑은 물이 흘러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곳으로 이름이 나 있는 동네로 훈훈한 고장의 인심과 아름다운 풍치가 있는 동네”라고 마을비 내용을 홍보하면서 “인구가 자꾸 줄어들면서 이 동네도 옛날 같지 않아, 젊은이들이 농촌에 있어야지, 그러니께 아이들도 볼 수 없고, 70% 이상이 노인들만 살고 있으니 빈집만 늘고 인구는 줄고 있으니 마을에서도 어려움이 많다”고 마을의 현실 상황을 설명했다.
영동군 용화면 용강리(龍江里)마을은 본래 관성군(官城郡, 옥천) 속현인 양산현(陽山縣) 지역으로 1313년 옥천군에 편입됐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옥천군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소동(漁沼洞)과 저치동(猪峙洞)을 병합해 용강리라 부르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됐다. 행정리명도 용강리이고 자연마을로는 상용강(어소)마을과 하용강(선암·仙岩, 선바우)마을이 있다.
용강리마을 입구에는 마을유래비와 보호수가 있으며, 마을의 할머니들을 위한 쉼터가 마련돼 있다. 마침 보호수와 마을비 옆에 지은 어르신 쉼터에는 에어컨이 뿜어내는 시원한 바람아래 할머니들 대여섯 명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네에서 이장님과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서 그렇다’며 마을에 대해 몇 가지를 물으니 “여기 노인쉼터에 있는 이 할매들은 일흔아홉인 얘 빼고 다 팔십이 넘고 90도 넘은 할매들여, 살아온 인생얘기나 하지, 동네에 대해서는 뭘 아는 게 있어야 설명해주지,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나 알지, 이 동네에서 60은 청춘여, 70 넘은 할아배들과 할매들이 8할은 될껴, 아마”라며 이 동네에 대해서는 “옆에 있는 비석에 다 쓰여 있다”고 말했다. ‘그럼 아이 울음소리는 언제쯤이나 들었냐’고 묻자 “기억이 가물가물해. 이 동네에서 태어난 얘들이 50~60은 됐을 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최근 몇십 년 동안은 마을에서 신생아 출생은 없었다는 얘기다. ‘여기저기 빈집만 생긴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용강(龍江)마을 유래비에는 ‘소백정기 뻗어내린 민주 덕유 빙설 흐르는 곳 민물고기 모여 노는 이소마을 내 고향 병풍쳐진 뒷동산과 넘나들던 귀미고개 동구밖 동구나무 조상님 넋 잠겨있고 우리네와 대대손손 길이 함께 이어살 곳 근면·자조·협동하는 새마을 정신으로 자랑스런 어소마을 잘 가꾸어 물려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