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충남에 2036년까지 새로운 초고압 송전선로 13개 노선이 건설될 계획이라 논란이 되고 있다. 충남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전국 석탄화력발전소 61기 중 29기가 충남에 몰려 있다. 이 때문에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 등지로 보내기 위한 기존의 송전선로가 곳곳에 있는데 또다시 새로운 노선이 깔리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충남에서 소비하지도 않거니와, 생산하지도 않는 전력을 수도권에 보내기 위한 노선이다. 새만금 일대에 들어설 대규모 태양광 및 풍력 발전 즉, 신재생 에너지 발전을 위한 전력망이다. 생산지와 수도권 사이의 경로라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 계획은 이재명 정부의 ‘에너지 고속도로’ 공약의 일환이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전력 자급이 어려운 수도권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통로를 뚫는 사업이다. 정부는 기존의 교류 방식에 비해 손실률이 낮은 고압 직류 송전을 핵심 기술로 내세우며 에너지 고속도로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호남권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낸다는 것인데, 재생 에너지라는 것 외에는 지역을 수도권 전력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기존 화력 에너지와 다를 바가 없기에 지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과연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신재생 에너지만 생산하면 되는 걸까? 최근에는 에너지 고속도로 뿐 아니라 ‘탄소 중립’이나 ‘RE100’(기업들이 자신들의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 에너지로 조달하겠다는 친환경 약속) 등 기후위기에 대한 방편으로 새로운 구호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진정 지속가능한 지구환경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인지,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고, 공생적 문화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의 재건에 이바지하려는 의도로 발간되는 계간지’ 녹색평론 191호에서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에너지전환’에 대한 글들이 실려 읽어보았다. 하승수, 정규석 님의 대담과 프랑스 역사학자 장바티스트 프레소의 인터뷰다. 대담에서는 에너지 고속도로류의 정책은 기후위기를 절실하게 고민한 결과라기 보다는 경제성장의 한 방편으로 추진되는 새로운 사업으로 봤다. 실제로 이재명 정부는 ‘실용’을 내세우며 신공항 건설, 인공지능 관련 산업 등을 추진하고 있어 그의 노선이 ‘성장주의’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인류의 파국을 앞둔 시대에, 우리는 경제성장보다는 다른 가치를 우선순위에 둬야 하지 않을까? 말이 ‘신재생’, ‘에너지’ 고속도로일 뿐이지, 그 내용의 본질을 보면 압축 성장이 이뤄지던 산업화 시기에 물류를 위한 고속도로를 뚫는 식의 사고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담에서 지적하듯, 기후대응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에너지를 더 생산하기보다 지금 생산하고 있는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구조에서는 아무리 신재생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해도 기존의 화력, 원자력 발전 전력 사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전력 사용의 총량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신재생 에너지일지라도 이를 생산, 유통, 분배, 소비하는 전 단계가 순환적인 체계가 되지 않으면 에너지전환은 허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송전선로를 전국에 세우려는 것만 봐도 진정 지속 가능한 에너지 체계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재생 에너지를 확대하면 바로 기후위기가 해결될 듯 선전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대담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탄소 감축을 위해서는 전기차 생산과 소비를 늘리기보다는 전체 차량 운행을 줄이는 것이 해법이듯, 진정한 에너지전환을 위해서는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대폭 줄여야 한다. 또한 단순히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에서 전체적인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도록 설계해야 하며, 지역 분산적인 구조 안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장바티스트의 말에 따르면, ‘삶에 정말로 필요한 일, 유용한 분야에서만 온실가스 배출을 허용할 수 있도록’, ‘모든 생명의 안녕을 도모하는 일 외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토록 절실하지 않고서 어찌 이 행성에서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할 수 있을까.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