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테클라, 700년 전통이 빚어낸 ‘시민의 자부심’
지역축제 포화시대, 지역성을 담은 축제로 변해야 한다⑩
지역축제를 둘러싼 논란과 비판은 해마다 반복된다. 과도한 상행위, 주민 동원, 유사 콘텐츠, 과장된 실적 등은 축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축제는 관광을 넘어 지역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는 공공의 장이어야 한다. 이에 홍주신문을 비롯한 5개 지역언론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2025 공동주제심층보도지원 사업을 통해 국내·외 축제 현장을 공동 취재·보도함으로써 지역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스페인 카탈루냐의 항구 도시 타라고나시(Tarragona)는 매년 9월 ‘산타 테클라(Santa Tecla)’ 축제를 개최한다. 1321년 성녀 테클라의 성유물 봉안 이후 이어져 온 이 축제는 종교적 전통과 시민의 열정이 결합된 복합형 축제로,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전통과 현대, 신앙과 공동체가 맞물려 움직이며 한국 지역축제가 참고할 수 있는 운영 철학과 실행 체계를 제시한다. 공동취재단은 지난 9월 23일(한국 기준) 축제가 열리고 있는 타라고나시를 방문해 산타 테클라 현장을 취재했다.
■ 700년 전통, 시민이 지켜온 타라고나의 혼
700년 전통의 타라고나 산타 테클라(Santa Tecla Tarragona) 축제는 ‘시민 주도-행정 조력’이라는 독창적 거버넌스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축제는 종교 의례, 인간탑, 불꽃 퍼레이드 등 500여 개 프로그램을 145개 시민단체가 직접 기획·운영했다. 어린이 전용 축제 ‘페티타’는 다음 세대에게 참여를 통한 시민교육을 제공하며, 전통 보존과 현대적 혁신을 동시에 이뤄낸 지속가능한 축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9월 12일 저녁 7시, 타라고나 구시가지 중심 플라사 데 라 폰트 광장. 오전에 내린 비로 젖은 석조 바닥이 저녁 햇살에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광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700년 전통의 산타 테클라 축제 개막을 알리는 ‘크리다’를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은 발코니까지 빼곡히 들어찼다.
개막 연설자는 산 살바도르 지역 활동가이자 배우인 비비아나 드 살바도르. 그녀는 “타라고나는 수천 년 동안 전쟁과 무관심을 견디며 자식들을 품어온 어머니지만, 종종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며 “기억하고 돌보는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자”고 강조했다.
비비아나의 할아버지 루이스 데 살바도르는 프랑코 독재기 폭격 속에서도 목숨 걸고 사망자 수를 기록한 언론인이었다. 어머니 몬세라트 데 살바도르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성장한 뒤 배우로 활약하며 평생 타라고나를 ‘사랑의 고향’으로 불렀다. 그녀는 산 살바도르 주민협회 회장으로 지역 공동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동했다. 비비아나는 마지막에 외쳤다. “타라고나를 사랑하는 것은 이 도시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비바 타라고나! 비바 산타 테클라!”
루벤 비뉴알레스 시장은 “비바 타라고나, 비바 산타 테클라, 그리고 비바 엠페리토!”를 외치며 축제의 공식 개막을 선언했다. 그는 산타 테클라 축제를 “타라고나 사람들의 영혼이 가장 뜨거워지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며, 시민들의 질서 있는 참여를 치켜세웠다.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 나왔지만 아직 사고는 없었다. 시민 의식이 이 축제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 낮밤 없이 이어지는 13일의 향연
축제는 9월 12일부터 24일까지 13일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아침 9시,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전통 악기 연주가 시작됐다. 점심때가 되면 거리마다 ‘테클라 타파’ 천막이 펼쳐지고, 타라고나 전통 음식 ‘에스피네타 앰 카르고린스(멸치 스튜)’와 ‘마마데타’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오후 4시, 대성당 앞 광장. 인간탑 공연이 시작됐다. 빨간 셔츠를 입은 ‘카스텔러(인간탑 팀원)’ 약 200명이 광장 중앙에 모였다. 드럼 소리가 울리고, 가장 아래층부터 차례로 쌓이기 시작했다.
“피냐(Pinya)!” 누군가 외쳤다. 가장 아래층을 뜻하는 이 단어는 카탈루냐어로 ‘함께 버티기’를 의미한다. 20~30명이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버티는 동안, 그 위로 2층, 3층, 4층이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헬멧을 쓴 여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꼭대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정적. 아이가 두 손을 하늘로 쭉 뻗는 순간, 환호와 박수가 뒤섞였다.
카스텔러의 한 팀원은 공동취재단에게 “인간탑은 공연이 아니라 철학”이라며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탑이 완성된다. 이게 바로 우리 공동체의 원리”라고 설명했다. 이어 “직업도 나이도 다르지만, 탑 안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서로의 몸을 감당하면서 신뢰를 배운다”고 의미를 전했다.
■ 불 속을 달리는 자, 두려움을 이기다
9월 23일 밤 11시.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코레포크(불달리기)’가 시작됐다. 대성당 앞 광장에 악마 복장을 한 시민 수백 명이 모였다. 긴 장대 끝에 불꽃을 매단 악마단이 앞장서고, 뒤로는 불을 뿜는 용 ‘드락’, 여성 용 ‘비브리아’, 황소 ‘보우’가 따랐다.
드럼이 울리기 시작했다. 불꽃이 터지고,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목은 순식간에 화염과 폭죽 연기로 가득 찼다. 열기가 얼굴을 때렸다. 관광객들은 뒤로 물러섰지만, 타라고나 시민들은 오히려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악마단의 일원인 안나는 “코레포크는 두려움을 다스리는 집단 훈련”이라고 말했다. “불은 위험하지만, 우리가 통제하고 공유하면서 신뢰를 쌓는다”며 “경찰도 소방관도 우리를 통제하지 않아요. 우리가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알렸다.
■ 어린이가 주인공인 축제 ‘페티타’
9월 22일 오전, 플라사 데 라 폰트 광장. ‘산타 테클라 페티타(작은 산타 테클라)’가 열렸다. 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축소형 거인 인형과 소형 용이 등장하고, 초등학생 악단이 전통 악기를 연주했다.
타라고나시교육청은 페티타를 공식 학습활동으로 인정하고, 매년 전체 축제 예산의 7%를 지원한다. 2021년부터는 14~18세 청소년에게 축제 운영권 일부를 이양하는 '청소년 기획단'도 운영 중이다.
■ 시민이 기획하고 행정이 돕는다
축제 운영의 핵심은 ‘민속문화운영위원회(세르구치 포퓰라르)’다. 약 60개 단체가 모인 이 위원회는 1년 전부터 회의를 열어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전통공연, 인형극, 불놀이, 인간탑 등 분야별 분과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의사결정은 만장일치 합의제다.
물론, 불꽃, 소음, 쓰레기, 상업화. 매년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주민 일부는 “밤새 소음에 잠을 못 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특히, 2023년 폭죽 낙하 사고 이후 타라고나시는 축제안전 전담부서를 신설했다. 모든 불꽃 행사는 보험 가입이 의무화됐고, 주요 행사장마다 응급의료 부스가 설치됐다.
하지만 타라고나시는 이를 강압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축제 거버넌스 회의를 열고 주민대표, 상인회, 시청이 함께 모여 개선안을 합의한다. 올해는 다회용 컵 보증금제, 여성·청소년 안심부스, 소음 가이드라인 개정이 새로 도입됐다.
■ 10억 원 투입해 100억 원 효과
타라고나시에 따르면 올해 축제 투입 비용은 약 10억 원이고, 직·간접 경제효과는 100억 원(약 600만 유로)으로 추정된다. 축제 기간 호텔 점유율은 90% 이상 달하고, 2000명이 축제 현장에서 일하고 봉사한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체류형 전환’이다. 낮에는 성녀 행렬, 오후에는 인간탑과 가족 프로그램, 밤에는 코레포크와 미식 행사. 시간대별로 다른 프로그램을 배치해 방문객이 하루 이상 머물도록 설계했다.
또한, 대성당과 주요 광장을 축으로 하고, 골목과 주변부에 분산 무대를 배치해 상권을 도시 전역으로 확장했다. 매년 디자인을 바꾸는 기념품은 조기 품절되고, 지역 식당들은 특별 메뉴로 매출을 올린다.
■ 전통을 지키되 혁신을 멈추지 않는다
산타 테클라 축제의 중세 의례와 도시 퍼레이드의 골격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 콘텐츠는 해마다 실험한다.
올해는 친환경 컵, LED 조명, AR 체험관이 새로 등장했다. 또한, 1979년 민주 지방정부 출범 이후 시민들은 잊힌 의식무용과 전설 속 동물 모형 행렬을 복원했다. 이러한 가운데 2010년 인간탑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마지막 날 밤, 코레포크가 끝나고 광장에 다시 모인 사람들. 땀과 재로 뒤범벅이 된 얼굴들이 서로를 껴안았다. 누군가 ‘엠페리토’를 부르기 시작했고, 수천 명이 따라 불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