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곧 꿈의 실현!”
필자는 67년 전인 1958년 4월 23일에 홍동에 있는 풀무고등공민학교에 제1회로 입학을 했다. 그 당시 경제적인 문제로 정규 중학교에 입학이 어려워 비정규 학교인 풀무학교에 입학해서 3년 과정을 마치고 1961년에 수업(졸업)을 했다.
중학 과정인 3년 기간 동안 내 인생에 큰 변화를 갖게 됐는데 설립자이신 주옥로 선생님께서 “보람 있는 일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일기를 써야 한다”는 말씀에 감동으로 다가와 지금까지 64년째 일기를 쓰는 계기이자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이찬갑 선생님께서 장래 희망을 쓰라는 말씀에 겁도 없이 ‘농촌 교육의 선구자’라는 거창한 제목을 쓰고 그 말에 책임을 지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고등부를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서울에 있는 어느 단체에서 대학교육을 시켜주고 앞으로 같이 일을 하자는 제안에 한동안 갈등을 겪다가 결국 교육자의 길을 택해서 외롭고 힘든 독학의 길을 선택했다.
설립자로서 지역에 계신 주옥로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시는 이들이 많으나, 이찬갑 선생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풀무학교는 전국적으로 대안학교라고 널리 알려졌는데, ‘과연 초창기 설립자분들은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실까?’라고 조심스럽게 자문하게 된다.
어떤 분은 나를 풀무학교 역사의 산증인이고 골동품 같은 존재라고 하며 골동품의 가격은 저렴하지만, 가치는 비싼 것처럼 높이 평가해 주기도 한다.
마침 1974년에 소천하신 고(故) 이찬갑 선생님에 대한 추억문집인 《새날의 전망》에 제1회 졸업생이자 모교 최초의 교사로서 투고한 글이 있어 투박한 글이지만 가감 없이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제는 탈바꿈의 때’라는 제목에서 이찬갑 선생님과 풀무학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관적 관계인 듯하다.
이찬갑 선생님이 풀무학원에 계셨던 기간은 불과 3년 남짓했고, 학원의 16년 역사는 유구한 세월에 비하면 찰나와 같을 것이다. 유한한 세계에 존재하는 삼라만상도 그 한계점이 있고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원칙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육신의 생명을 영원히 지속하거나 죽음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선생님의 별세에 대해서 크게 의아스러운 점은 없다.
선생님은 지나간 70년 평생을 이 세상에서 사셨고 그중에서 3년 남짓한 기간을 풀무에서 사셨다. 누구나 다 살고 누구나 다 죽는 생사문제지만 보람 있게 사셨고 값있는 죽음을 죽으셨기에 더욱 고인을 추모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30년의 준비기간과 3년간의 공생애로 구분한다고 한다. 외람된 말씀 같지만, 선생님의 생애는 45세까지는 준비기간이요, 그 후 풀무학원에서의 3년의 생활이 생애의 최절정기(最絶頂期)였으며, 14년간의 와병(臥病)의 생활은 욥과 같은 고난의 단련기였고, 마지막 단계로 소천하셨다고 생각된다.
북부의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많은 활동을 했으며 이남의 맨 끝 남해안까지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까지 농촌을 순례하시며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 쌓으신 줄 안다.
오랫동안 경험에서 생애의 결정체로 집결된 것이 민족혼의 고취요, 농촌에서의 이상적 교육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새 둥지처럼 불안하고 거꾸로 인쇄된 활자처럼 모순의 연속인 것 같다.
한국사상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던 1960년대에 의(義)의 칼을 들고 전투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풀무학원이었나 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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