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들

2013-05-10     권기복(홍주중 교감. 시인/극작가)
"얘, 기복아! 니 동생들 쌈 났어." 같은 반 친구가 나에게 뛰어왔다.
친구에게 끌리다시피 교실 밖으로 나갔다. 큰 누이와 작은 누이가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있었다.
"너희들 뭐하는 짓이야."
오라비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란 두 누이는 토끼처럼 폴짝 뛰어 물러났다. 그들의 오른손에는 쥐어뜯긴 빵 쪼가리가 들려있었다.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와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니 둘째 동생이 와서 빵을 하나 주었는데, 금세 뒤에 온 큰 동생이 나누어 먹자고 대들어서……."
더는 듣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졌다.
"당장 집에 돌아가!"
나의 노여움 가득한 목소리에 동생들은 책보를 챙겨서 슬슬 물러났다. 그 때까지 오른손에 쥐어진 빵은 더 꼭 그러쥐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누이들은 종아리를 5대씩 얻어맞았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큰 누이는 3학년, 작은 누이는 1학년이었다. 4학년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한 덕인지 몰라도, 누이들이 친구들한테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그러다보니, 누이들은 학습이 끝나는 대로 우리 교실 옆에 와서 두세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마침, 교실 옆 현관 너머는 놀이동산이 꾸며져 있어서 제 혼자서도 심심치 않을만한 곳이었다.
배고픈 누이들은 염치가 없었다. 매 맞은 다음 날도 여전하였다. 내가 지급받은 빵을 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주기도 하는 것을 얻어먹는 재미였다. 또한 친구들이 친동생 이상으로 함께 놀아주는 재미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먹거리였다. 나의 유년도 유달리 빈곤한 생활에 시달렸지만, 남녀차별이 심했던 그 때에는 외아들과 여러 여동생들의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름철 밥상은 꽁보리밥 투성이었다. 그나마 할머니와 아버지, 내 밥그릇에는 쌀이 조금 섞여있었다. 어머니와 누이들의 밥그릇에서는 쌀 한 톨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입안에서 미끌거리는 보리알이 너무 싫어서 입 한 쪽에 몰았다가 몰래 뱉어내곤 하였다. 할머니에게 들키는 날에는 밥그릇까지 빼앗겼다. 누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세 사람의 밥이 남으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한 바탕 난리가 났다.
내가 대학을 갈 때, 큰 누이는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집안 형편상 큰 누이는 합격한 고등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동네에서 친언니처럼 따르던 경숙이 누이를 따라 도회지의 방직공장으로 떠났다. 그 후에 간간이 보내는 편지 속에는 하루 14~15시간 근무하면서 야간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둘째 누이도 2년 뒤에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겠다는 고집을 꺾고, 눈물범벅으로 큰 누이를 따라갔다.
두 누이는 의지가지로 청춘을 최악의 환경에서 버텨냈다. 주경야독으로 학업도 이어갔다. 나와 두 누이가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셋째 누이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막내 누이는 큰 누이를 따라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이 없었던 큰 누이가 병색이 가득한 몸으로 시골에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오빠,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나는 흐려진 눈 때문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잡은 손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도 누이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건강하게 살고 있다. 못난 오라비를 지극정성으로 대우해주고 있다. 나는 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다. 누이들 덕분에 혹한의 시련을 이겨낸 봄꽃들이 더욱 아름다움을 알게 해줘서 그 또한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