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한가위’로 시작 ‘1945년 해방’으로 끝나는 ‘토지’
일제강점기·해방공간 문학의 배경도시, 역사·문화관광 로컬 브랜드로 〈5〉
한 말부터 일제강점기 격변하는 시대, 한민족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
8월 15일, 한국인들에겐 ‘광복의 날’이자, 일본인들에겐 ‘패전의 날’
하동 평사리서 출발 한반도, 만주 간도, 일본 도쿄 광활한 무대 오가
‘토지’의 무대를 평사리로 잡은 것, 경상도 방언을 풀어놓을 수 있어
한국 근현대 문학의 큰 산맥 박경리 작가(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의 시작과 끝은 ‘8월 15일(8·15)’로 연결돼 있다. ‘1897년의 한가위(음력 8월 15일)’로 문을 연 ‘토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 조국 광복의 감격을 긴 여운으로 그려내며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작가가 25년에 걸쳐 필생의 역작으로 집필한 이 소설의 완간 일도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였다’고 한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본명 박금이) 작가는 20년 가까이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대하소설 ‘토지’는 한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격변하는 시대 속 한민족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작가에게 일본은 아픈 기억이자 굴레였으며, 분석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해마다 8월 15일은 한국인들에게는 ‘광복의 날’이자, 일본인들에게는 ‘패전의 날’이다. 1994년 8월 15일은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가 완간된 날이기도 하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이다. 사반세기 동안 세속과 거리를 두고 지독한 고독 속에서 단 하나의 작품, 단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끊임없이 완성도를 추구한 것은 세계 문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박경리의 ‘광복의 빛’을 향한 집념과 ‘토지’ 속 민초들의 거친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둠을 견디는 참음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
박경리 작가가 대하소설 ‘토지’를 완성한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의 옛집에는 ‘박경리문학공원’이 조성됐고, 원주시는 8월 15일을 소설 ‘토지의 날’로 제정, 기념하고 있다. 올해도 소설 ‘토지’ 완간 31주년을 기념하는 ‘토지의 날 행사’가 열렸다. 또한 ‘토지’의 배경도시인 경남 하동 악양면 평사리에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2004년에 설립된 평사리문학관이 2016년에 박경리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이 단장했다. 지난 10월 18일에는 이곳에서 ‘2025 토지문학제’가 열렸다.
한편 ‘박경리기념관’은 작가의 고향인 경남 통영시 산양읍 한적한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10년 5월 개관했는데, 지상 2층 규모로 전시실·영상실·자료실·다목적실로 구성돼 있고, 야외에는 동상과 묘소(추모의 공간)로 이뤄져 있다.
박경리기념관 설계자는 건축가 류춘수라고 하는데, 강원도 원주 박경리 작가의 집을 설계했던 건축가란다. 박경리기념관 건물 구조는 독특하다. 우선 박경리 작가의 인생관을 담아 최대한 검소하게 설계됐는데, 특히 기념관 출입구는 뒤쪽에 있다. 건물 벽은 통영의 섬을 입체적으로 표현했으며, 바닥은 자연과 생명을 사랑한 작가를 기려 흙·풀·새싹을 이미지화했다고 전한다. 전시관에는 작가가 평소 집필하던 강원도 원주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특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토지’ 등의 자필 원고를 전시해 놓았고, 작가의 문학적 고뇌를 담은 글도 보인다.
방문객들은 전시관 앞 너른 마당에서 박경리 작가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아래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토지’는 민초들의 한(恨)과 소망 이야기
대하소설 ‘토지’는 1897년 조선말의 ‘8·15 한가위’, 박경리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자의 수탈로 가장 풍요로운 계절에 굶주려 죽어간 민초들의 삶에 연민했다. ‘8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쌉쌀한 한산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 될 수 있을는지.’-토지 1부 제1편 어둠의 발소리-
‘토지’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 간도, 일본 도쿄까지 광활한 무대를 오가면서 ‘8·15 광복’을 맞기까지 민족 수난의 역사를 헤쳐나간 민초들의 삶과 생명력을 그려냈다. 총 5부 20권, 200자 원고지 4만여 장 분량에 등장인물만 600여 명이다. 소설로 쓴 민족 근대사의 대서사로 평가받는 이유다. 1969년 박경리의 나이 44세에 집필을 시작해 25년 만인 1994년 69세에 완간했다. 고향과 인연, 세속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수를 놓듯 한땀 한땀 창작에만 매달렸다. 세계 문단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치열한 작가정신의 표상이다. 작가는 왜 이토록 ‘토지’에 천착했을까.
박경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긴 유고 시 ‘옛날의 그 집’에서 말한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줬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사마천이 누구인가. 중국 한(漢) 무제 시대 역적으로 몰려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궁형(거세)을 선택해 위대한 역사서 ‘사기(史記)’를 남겼다. 박경리는 사마천의 삶을 연민하며 글을 썼다. ‘살아야 한다고, 글로 써서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박경리 작가는 암 수술을 받고도 퇴원하자마자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집필을 계속했다. ‘토지’ 완간 기념 소감문에서 “내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듯이 아픈 가족사의 칼날도 견뎌내야 했다.
‘토지’는 사상과 지식보다는 민초들의 일상사가 올올히 담겨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 질곡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민초들의 나라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잊지 말 것을 되새기게 한다. 박경리는 토지를 문서로 보았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땅은 토지라기보다 대지에 가깝다. 땅에 금을 긋고 인간이 소유를 주장할 때 대지는 토지로 변한다. 그래서 ‘토지’는 소유와 욕망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민초들의 한(恨)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토지’ 완성한 원주 옛집, 박경리문학공원
원주의 ‘박경리문학공원’은 박경리의 소설 혼이 담긴 공간이다. 박경리 작가는 통영에서 출생했으나, 원주에 대단한 매력과 애착을 갖고 이곳에 터를 잡고 많은 집필활동을 했다. 특히 소설 토지 4, 5부를 완성한 곳이기에 더 의미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박경리문학공원은 1989년 박경리 작가의 옛집이 택지개발지구로 편입돼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한 문화계의 건의에 따라 한국토지공사의 시공으로 1999년 5월 완공됐다. ‘토지문학공원’으로 불리다가 2008년 ‘토지문화관’과 명칭이 유사해 탐방객의 혼란을 막기 위해 ‘박경리문학공원’으로 불리게 됐다.
공원시설로는 작가가 생전에 손수 가꾸던 텃밭과 소설 토지 4부와 5부를 완성한 곳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옛집, 전체 5층 건물로 전시실과 자료실, 세미나실을 갖춘 ‘박경리 문학의 집’이 있다. 문학의 집은 국내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고 디자이너가 공을 들인 공간으로 2층에는 생전의 작가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과 유품이, 3층에는 소설 토지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각종 문학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북카페 1층은 공원관리실과 느린 우체통 체험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2층은 작가의 작품과 그림책을 포함한 다양한 서적을 비치했다. 이외에도 평사리마당, 토지 2부의 주요 배경지였던 용두레벌, 작품 속에 어린이 등장인물인 홍이를 딴 어린이를 위한 공간인 ‘홍이동산’이 있다.
소설 ‘토지’의 주 배경지인 경남 하동 평사리는 실존하는 지명이다. 경남 하동군 약양면에 거대한 지리산의 능선과 넓은 평야,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 작은마을이다. 박경리 작가는 이곳을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소설 속 허구의 장소인 최참판댁을 비롯한 평사리 에 ‘박경리문학관’을 세웠다.
평사리 최참판댁은 한옥 건물 14동으로 구현했으며, 남자 종들이 묵는 행랑채, 아버지와 아들이 기거하는 사랑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는 안채, 딸이 신부수업을 위해 묵는 별당을 갖추고 있다.
최참판댁을 나와 왼편으로는 박경리 작가의 동상이 서 있는 문학관을 만날 수 있다.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였던 한옥 건물을 개조해 만들어진 문학관에는 박경리 작가의 혼이 보이는 곳이다. 300㎡쯤 되는 공간의 벽면과 진열장에 작가의 개인사와 창작열과 일상을 더듬을 수 있는 갖가지 책자와 초상화, 사진, 영상물 등이 전시돼 있다. 박경리 작가의 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무상 대여한 박경리 작가의 유물 40여 점도 있다.
경남 하동군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평사리에 석민아 공무원의 제안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을 조성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인구가 감소되는 상황에서 ‘토지’ 때문에 하동 땅 평사리를 찾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경상남도의 도비 10억 원과 당시 정구용 하동군수가 군비 30억 원으로 부지 3000평을 구입, 2001년 소설 속 최참판댁을 재현했고, ‘박경리문학관’을 세웠다.
박경리가 ‘토지’ 무대를 평사리로 잡은 것은 전라도 사투리를 잘 몰라서였다고 한다. 사실 몰라서라기보다는 통영 출신의 박경리가 경상도 방언을 풀어놓을 수 있는 지역이 평사리였다. 땅은 전라도와 비슷하게 넓은 평야가 있어 만석지기 두엇은 낼 수 있는 곳, 게다가 소설의 전개상 중요 거점이 될 지리산이 가깝고, 아름다운 섬진강을 안고 흐르는 땅을 찾다 보니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하게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는 평사리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작되는 1부와 마지막도 평사리가 주요 배경이 된다는 설명이다. ‘토지’의 첫 문장은 ‘1897년의 한가위’로 시작하고 마지막 문장은 서희의 딸이 해당화를 들고 “어머니, 이,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로 끝난다.
박경리와 관계된 문학관은 전국에 세 개다. 하동의 ‘박경리문학관’,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서울 생활을 접고 원주에서 살았던 공간은 ‘박경리문학공원’으로 변했다. 작가가 생전 거주하던 옛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박경리가 태어난 통영에는 ‘박경리 묘소’와 ‘박경리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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