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연민, 정직
중고등학생 시절 들었던, 출처는 없지만 실체는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 어느 선배는 싸움을 잘해서 폭력조직에서 눈여겨보고 있다더라, 누구는 벌써 섹스를 해봤다더라, 도시에 나가서 클럽에 갔다 왔다더라, 주말이면 인력사무소에 나가 돈을 번다더라, 군대에서는 휴가를 갔다와서 푸는 ‘업소 썰’을 꽤 듣기도 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대체 ‘저 세계’에 접근이 쉬운 환경은 뭘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착실히 공부만 하는 범생이에 가까웠고, 그건 내가 가진 환경과 조건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한 번씩 신발에 치이는 헐벗은 여자 사진이 박힌 업소 명함뿐이어서, ‘저 세계’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면 ‘저 세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 막연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선생님은…… 고생을 해보신 적이 없지요?”
대학생 시절 야간 직업학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다, 자신을 좋아하는 한 학생에게 들었다던 말이다. 고생을 해본 적 없이 대학생이 된 사람과 고등 검정고시를 마치고 형광등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 사람. 그 환경의 차이. 그 차이가 만들어낸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차이.
‘고생’이라는 말은 내게도 뼈아프다. 나는 시골에서 컸지만 농사일은 잘 몰랐다. 정 일손이 모자랄 때 참여하는 이벤트였지, 구체적인 일상은 아니었다. 농촌의 풍경 자체에는 익숙하지만 그 풍경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일에는 무지했다. 내가 가진 고생의 원형(原形)은 할머니의 굽은 몸이다. 사람 몸을 그 지경까지 끌고 가는 삶의 압력이 내 인생에는 없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자취하던 때, 한 번씩 전화로 서울살이 고생이라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고생을 해본 사람과 그 고생을 기반 삼아 위로 올라간 사람. 괜찮은 직장을 얻어 안정적인 돈벌이를 하며 그 돈으로 고생한 사람 호강 시켜주면 되지 않느냐, 그게 효도이지 않겠냐, 사회적으로 보자면 그게 선한 영향력이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쩐지 내게는 이런 사고방식이 거북스럽다. 국회의원이 되어 이 지역을 잘 살게 만들어 주겠다는 선거철 유세 슬로건을 보는 것 같다. 같이 가난하겠느냐, 네가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겠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만 전자를 고르고 싶어진다.
환경과 조건의 차이를 뛰어넘어 완전히 같은 입장에 서는 것. 꿈같은 얘기다. ‘네가 누리고 있는 것 다 버리지도 못할 거면서 말만 그렇게 하면 무슨 소용이냐, 위선떨지 마라’는 욕도 어느 정도 정당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무대에서 조명받는 사람과 무대에서 배제된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은 기껏 서 푼어치도 안 되는 연민밖에 없다. 그리고 연민은 오갈 수 있는 다리라기보다는 오가지 못하게 막고 선 장벽과 같아서, 자기 불편한 맘을 자위하는 것밖에 안 될지 모른다.
책에서 시인 김수영의 일화가 짤막하게 나온다. 어느 날 만취해서는 거지가 돼야겠다고 소리쳤다는 시인 김수영. 물론 그는 거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정은 거지가 되지 않고는 도저히 위선과 허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말해주고 있다.
때때로 비슷한 종류의 절망감을 느낀다. 모든 것을 버리기 전에는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진정으로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연민을 간직한 사람이 좋다. 그 반대편에서 자기 노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믿고, 깔끔하고 세련된 태도로 마치 자기는 별세상에 있는 듯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쉽게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은 좀 재수 없다. 아니, 많이 재수 없고 멍청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저 인생이 내 인생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저런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면, 저런 삶의 조건을 가졌다면, 내 인생이 저렇게 ‘나쁘게’ 될 수도 있었겠구나. 모순을 벗어던지지 못하더라도 이 감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좋다.
내 할머니 세대의 시간, 학창시절의 ‘거친’ 친구들, 공장에 돈을 벌러 나가는 사람들, 업소 명함의 그 여자…… 깊은 우물 속 어둠과 같이 내게는 더 구체적으로 다가가기 어려운 ‘하나의 거대한 추상’이다.
모두가 수행자처럼 삶을 벗어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상의 부박함 속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도 어려운 것이라고 해야 할까. 중력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야 하는 팽이처럼 모순에 대해 끝없이 정직할 것. 비록 수족관의 넙치가 옆으로 난 눈을 굴려 ‘바깥’을 바라보는 꼴밖에 안 될지라도.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