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탈바꿈의 때〈2〉
광활한 이 우주상에서 어째서 이곳 풀무골에서 생애의 최절정을 이루신 것인지 진정 이는 인간의 계획 이상 하나님의 섭리라 생각된다.
빙산일각이라 하듯이 선생님 생애의 3년간을 보고서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짧은 기간동안이었지만 보고 배우고 느꼈던 점들을 몇가지 회고해 보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58년 4월 23일에 본교가 개교했다. 교사는 이찬갑 선생님과 구옥로 선생님 두 분이었고, 학생은 처음에는 18명 정도였다. 그때 이 선생님의 연세는 54세였고, 주 선생님은 40세였다.
역시 두분이 만나시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쩜 두 선생님은 가정의 부모와 같았다. 이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엄격하시고 단도직입적이면서 직선적이셨다. 주 선생님은 어머니처럼 인자하시며 주모면밀하시고 원형적이셨다.
좋은 가정이란 부엄모혜(父嚴母惠)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우선 이 선생님의 면모를 몇 가지로 나눠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용모. 선생님의 키는 그리 크지 않으시나 용모는 항상 단정하시며 거의 한복을 입으셨고, 음성은 맑고 컸다.
둘째, 성격. 한마디로 말해서 예민하시고 극단적이었다. 엄격하고 강직하셔서 불의나 거짓은 조금도 허용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다.
셋째, 사상. 민족애와 민족혼의 고취였다. 휴전선의 잘림은 마치 사람의 허리를 꽁꽁 동여맨 것처럼 신음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그것이 풀린다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고 나라말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국사와 국어를 강조하셔서 가르쳐 주셨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농촌 부흥이요, 새 시대의 총아일 농촌에 이상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넷째, 신앙.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었지만, 평소에는 전혀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신앙보다 민족을 더 강조했다. 항시 기도를 많이 하셨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셨다. 예수 냄새를 피우지 않으시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신앙의 본을 보여주셨다. 성서를 탐독하셨고, 매일 성서와 같이 신문을 읽어야 된다고 하셨다.
다섯째, 교육관. 실력 교육, 인격 교육 또는 지극한 사랑에 의한 교육이었다. 그때 과목 분담은 이 선생님께서 역사, 지리, 공민, 생물, 국문법을 맡았고, 주 선생님께서 국어, 영어, 수학, 한문, 물상 등을 맡으셨다.
두 분이 많은 과목을 분담하셨기에 수업 준비로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전날 배운 것은 다음 날 전부 외워야 ‘문답’에 대답할 수 있었으며, 못하면 눈물이 나도록 책망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오가는 길에나 쉬는 시간에도 책을 봐야 했다. 또 공부는 일생동안 죽는 날까지 하는 것이 산 공부이지 입시 준비며, 입신출세하기 위한 것은 썩은 공부라 하셨다.
여섯째, 사회관. 가끔 ‘이북에 계시다가 이남에 오니 찬 냉수통에서 뜨물통에 온 것 같다’고 하셨다.
농촌을 무척 사랑하셨으며, 부지런히 일하며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항시 말씀하셨다. 이따금 들판에 밥그릇을 내가는 아낙네를 보시면 ‘우주를 이고 가는 것 같다’고 칭찬하셨다.
반면 도시에서 사치를 부리는 현대 여성들을 역겨워하셨다. 도시 문명을 배격하시며 ‘구정물 문화’라고 하시고 도시 진출을 반대하셨으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것을 5, 6월 변소에 구데기 같다’고까지 하셨다.
새 시대의 총아는 농촌이라 하시며, 농촌 청년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밤에는 부락에 다니시며 강연도 하시고, 농사법을 가르쳐 주시고 면내 청년회를 조직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신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풀무골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다음 호에 계속>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