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문화의 바탕 말과 글 〈8〉

2025-11-20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strong>범상스님</strong><br>석불사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중국 문자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한족의 황화 문명보다 앞선 요하 문명, 즉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지역에서 표의문자(表意文字) 원형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어 한자라는 용어를 버리고 우리 민족의 ‘고문자’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웅자의 변천(能→熊)과, 둘 이상의 글자를 합쳐 새로운 뜻의 글자를 만들어내는(能+罒=罷) 고문자 조합 방식인 회의(會意)를 통해 그 근거를 제시했다. 이어서 우리 민족(東夷)을 나타내는 이(夷)자가 본래 뜻을 잃어버림으로써 스스로 오랑캐가 돼버린 문제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설문통훈정성》 등에서 ‘이(夷)는 인(仁)과 같고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했던 ‘夷’가 언제부터 오랑캐로 읽혔는지 알아보자. 진태하는 ‘큰 활 이(夷)’로 읽어야 한다고 전재하고, 《용비어천가》에는 두만강 밖 올랑합(兀良哈)이라는 지역에 살던 여진족이 우리의 변방을 자주 침입했고, 그들을 변방 야만족이라 하여 ‘오랑캐’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때 올랑합은 몽고 동부의 지명이었으며, 종족은 ‘오양해’라 한다. 이후 자전에서 이(夷)를 적(狄), 융(戎), 만(蠻) 등과 함께 오랑캐라 부르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당시 자전 편집자들 역시 오늘날 영어를 써가며 유식함을 뽐내는 서구사대주의와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적(狄)은 북방 오랑캐’, ‘융(戎)은 서쪽 오랑캐’, ‘만(蠻)은 남방 오랑캐’인데 ‘동쪽 오랑캐’라는 글자가 없었다. 그래서 친절하고 비굴하게도 이(夷)자를 ‘동쪽 오랑캐’로 명명하고 스스로 야만인을 자처하며 모화(慕華) 사대에 아부한 것이라 본다. 안타깝지만 이와 같은 일들은 1인자의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2인자의 심리’를 가진 인간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문제는 2인자의 심리가 ‘노예근성’으로 고착화된다는 데 있다.

흔히들 영국신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박물관, 세계 도처에 빅토리아왕조를 나타내는 온갖 미사여구 등은 영국이 식민제국주의를 통해 심어둔 침략의 흔적들이다. 그런데 고착화된 노예근성은 여전히 그것들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앞선 것이라며 칭송하고 따라간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서울에 갈 때마다 참으로 묘한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자주 가는 인사동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중 30%가량이 외국인들이며, 이들의 우리말 실력과 문화에 대한 이해는 놀랍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인류사에 처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식민침략을 통해 강제로 이식한 언어와 문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매력에 반하여 스스로 배우고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식민을 통해 남의 나라 자원을 약탈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일본 식민에서 곧바로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편입됐다. 이후 전쟁을 겪었고 휴전 중인 나라가 세계 주도국으로 성장한 것은 인류사에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계인들은 자발적으로 우리 문화와 말과 글에 열광하고 한글은 AI 문명을 주도하는 문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 국가기관의 언어, 학문, 거리 간판 등은 외래어로 도배가 되고 있다. 

문화는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 이때까지 교류는 물리적 힘과 강제적 의도에 의해 이뤄졌다면 현재 한류열풍은 자발적인 것으로 그 양상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힘에 의한 문화전파라는 과거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고, 백인우월주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유럽 일각은 대한민국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라고 치부한다. 중국 역시 한류열풍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 문화의 원류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억지 강짜를 부린다. 여기에 대해 세간에서는 중국인들인 한글을 자기들 것이라 우기지 못하는 것은 세종대왕께서 예지력이 있어 한글을 창제하며 그 첫머리에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라고 못 박아 놓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세계의 중심 중화(中華)라 자부해온 중국의 다양한 문화보다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는 그 이면에는 세상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말과 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 오랑캐로 돌아가서 이(夷)라는 글자 하나를 잃어버려 스스로 오랑캐가 됐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다른 측면을 살펴보자. 어느 날 우리 민족은 한문이라는 이름으로 문자를 빼앗겼다. 그래서 한(漢)나라 또는 한문의 한(漢)을 우리식으로 오랑캐라 박재해 놓았다. 그 증거로 파렴치한, 치한, 괴한, 악한 등등이 있다. 물론 본래 뜻으로 긍정적 표현인 장한, 강한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긍정적 의미를 가져와서 오랑캐로 박재해 놓았다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려는 자들에게 ‘미국×’, ‘되×’, ‘쪽××’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심리적 맥락에 있는 게 아닐까 유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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