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소리’

2025-11-27     이예이 칼럼·독자위원
<strong>이예이</strong><br>홍성녹색당<br>칼럼·독자위원

홍성글로벌바베큐페스티벌(이하 홍성글바페)가 열리던 첫 해, 장내에 끝도 없이 걸려있는 닭들, 그 괴이한 풍경에 ‘다시 고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확실히 먹는 횟수를 줄이긴 했지만, 끊지는 못했다. 특히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형부의 야외 작업실에서 모일 때는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그릇으로 일회용기까지 쓰는데, 그때마다 채식을 하던 내가 자주 안주거리가 된다.

진지함은 희화화되기 쉽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노골적이다. 처음 녹색당에 입당했을 때, 탈핵이니 기후위기니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갑자기 고기를 끊어버린 나를 두고 가족들은 어떤 종교 집단에 들어갔다고 믿었다. 종이컵을 쓰지 말자거나 채소 요리를 먹자고 하는 말들은 고작 ‘웃기는 소리’ 정도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설치지 않고 고기도, 종이컵에 따라주는 술도 잘 받아먹는 나를 가족들은 만족스럽게 쳐다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비로소 이 자리가 편안해졌다고 느끼고, 그럴 때면 아 나는 뼛속까지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브래디 미카코의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는 브릿팝의 ‘늙음’이란 주제로 엮은 에세이집이다. 작가가 빈곤지원시설에서 일하며 만난 사람들, 브라이턴 지역의 풍경을 그린다. 펑크에 미쳐 일본에서 영국까지 이주를 결행한 저자가 추적하고 있는 것은 펑크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 이토록 펑크가 ‘늙어버린’ 이유다. 빈민가 아이들의 음악이 어째서 상류층의 전유물이 돼버렸나.(중산층 및 상류층의 자녀들이 음악업계를 점령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펑크의 정신’이라는 게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펑크의 정신이라고 하면 ‘네 스스로 해라(Do It Yourself)’. 대처 시절부터 이어진 보수당의 오랜 집권에 대항하며 탄생한 하위문화였다. 섹스피스톨즈 같은 빈민 도시 출신의 걸출한 밴드들의 등장에 펑크는 지방 빈민 아이들까지 저항 운동에 끌어들인다. 저변에는 ‘1945년의 시대정신’이라 불리는 노동당의 개혁이 있었다. 자신의 계급에 강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는 노동자 계층이 있었기에 록과 펑크는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보수당의 오랜 집권기 끝에 블레어 정권이 등장하면서 브릿팝의 전성기도 끝이 난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며 자랑스러워하던 과거의 노동자 계급은 사라지고, 생활수당에 의존하는 ‘언더클래스’, 피해자 의식이 강한 하층민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언론에서는 ‘챠브’라는 양심 없고 비도덕적인 데다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하층민의 이미지를 조직적으로 양산해낸다. 록의 고향인 공영주택지를 깨끗하게 철거한 것처럼 정부는 ‘우리는 모두 부자’라는 산뜻한 이념을 퍼뜨렸다. 과거 록이 하층민의 절규를 노래했다면, 이제는 ‘핍박받는 존재’라는 개념조차 시대착오적인 것이 됐다.

저자가 사는 브라이턴은 예로부터 록과 아나키스트가 ‘명물’이라 꼽히는 곳이다. 밴드 크라스로부터 계승된 아나키즘 운동을 ‘아직도’ 끌고 온 이들, 실업급여와 기초생활보장을 수급하며 정치 활동이나 자원봉사에 매진하는 이들은 남들 눈엔 양심도 대책도 없는 ‘무직자’일 뿐이다. “보수당의 정치란 ‘우리처럼 살아라. 우리처럼 되는 게 모범 국민이 되는 길이다’라고 하는 거야.” 나이 든 아나키스트의 진지한 말에 ‘뉴펑크’라 등장하는 젊은 음악인이 조롱하듯 대꾸한다. “백수한테 사상은 필요 없어.”

‘평범하지 않은’ 진지함도 비웃음을 사기 쉽다. 희화화는 꽤 정치적인 도구다.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어떤 존재를 지울 때 흔히 쓰는 수법이다. 프레임을 씌워 ‘호소’를 ‘웃기는 소리’로 깎아내리는 것. ‘Rock the boat’ 록이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회를 뒤흔드는 음악이었건만, 누군가를 흔드는 말은 이제 시대에 맞지 않는 ‘웃기는 소리’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펑크의 늙음과 더불어 브라이턴에서는 전처럼 아나키스트를 보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정치적 표현의 하나로 드레드 헤어를 한 이들, 저항하느라, 자원봉사 하느라, 공동농장에서 유기농 작물을 재배해 자급하느라 생애 대부분 ‘쓸데없는’ 노동을 하던 무직자들이 거리에서 사라진 것은 “이러쿵저러쿵해도 (…) 세상에서 반론 하나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홍성글바페 현장에서 지역의 환경단체들이 모여 시위를 했다고 한다. 60만 명이 방문했다고 하는, 홍성군 전체가 축제에 매진하는 것만 같던 어딘가 들뜬 이 분위기 속에서 ‘고기 축제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그것도 종이박스를 재활용한 듯한 피켓을 든 이들의 사진을 보고 ‘이 시대의 록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웃기는 소리’들이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조롱당하는 쪽에 함께 서고 싶다면 이 책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를 추천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