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지역 독립운동, 의병전쟁에서 3·1독립운동까지
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7〉
계룡은 예부터 정감록에 십승지지로 알려진 곳으로, 태조 이성계도 이곳을 도읍지로 정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항일운동이 아주 격렬하게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울분을 달래지 못한 계룡에 거주하는 12명의 주민들은 동용추 석벽 위에 자신들의 호와 이름을 전부 새겨 넣으며 ‘일본의 백성이 아니다’는 뜻의 ‘용산12일민회((龍山十二逸民會)’를 만들어 일본의 창씨개명 반대 운동과, 동흥의숙(東興義塾)이란 서당을 차려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용산12일민회 참여자는 소창 김완수, 형당 이유철, 송은 이일우, 감파 최정하, 성제 유화준, 초운 이건재, 담암 민용식, 당제 정민조, 석정 안종순, 지산 황기수, 혜운 김제순 등이다.
계룡지역에는 조국 광복을 기원했던 대한광복단과 광복단결사대를 결성한 애국지사가 있는데, 바로 신도안면 정장리의 한훈이다. 또 국권이 침탈되자 군수 직을 내던지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장렬히 전사한 두마면 출신 양기하 장군, 두계 장터에서 4월 1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입암리 배영직 등 당시 전국 면(面) 단위로는 최고로 많은 50여 명의 우국충신들이 탄생한 곳이 바로 계룡지역이다. 계룡 투계장터에서 벌어졌던 3·1독립만세운동은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일제가 만든 철로를 파괴하려 하기도 했던 격렬한 항일운동이었다.
■ 한훈, 광복단 결사대 조직해 활동
한훈(韓焄, 1889~1950)은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에서 1889년 3월 27일 아버지 한성교와 어머니 성자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한우석이며 가명으로 만우, 동열, 조선달 등을 썼고 자는 성초이며, 호는 송촌(松村)이다.
1906년 한훈은 17세의 나이로 홍주의병에 참전하게 된다. 이는 한훈이 독립운동에 몸담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의병에 가담하게 된 계기는 홍주의병에 가담해 칠갑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외숙의 유언을 듣고 친형 한태석과 함께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한다는 목적으로 참여했다.
홍주의병 이용규 휘하에 소속돼 부여, 노성, 연산, 정산, 공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7년 홍주 의병이 실패하자 한훈은 신도안에서 은거하며 나철, 기산도, 오기호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해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지만 나철이 일경에 체포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악질 직산군수를 처단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행은 한훈의 항일투쟁에 또 다른 기회였다. 뜻을 같이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게 됨으로써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 항쟁할 목적으로 귀국한 한훈은 채기중과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해 조선 침략의 원흉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지만 사전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한훈은 조국 광복을 향한 의지로 국내에 잠입해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지역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의 광복단이 연합, 조직한 단체로 계몽운동계열의 공화주의 정치이념과 의병전쟁의 무장투쟁방략을 서로 수용해 통일된 형태의 운동노선을 지향했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선임하고,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임명해 만주에 상주시켰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했다. 또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한훈은 전라도지역 책임을 맡아 의열 투쟁과 군자금 모집에 전력을 다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보내고 자발적인 의연금을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친일 부호의 처단 등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파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다. 1917년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했고, 충청지부에서는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해 친일 부호와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 시켰다. 이때 한훈은 전라도에서 활동하면서 1916년 보성에서 양재성, 별교에서 서도현을 처단했다.
이밖에도 서도현의 당질인 서인선을 납치해 1만 원의 군자금(1917년)을 모집했고, 전북 순창의 오성(烏城) 헌병분대를 습격(1917년)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이처럼 한훈의 눈부신 의열 투쟁은 비밀리에 완벽하게 수행해 대한광복회의 혁명목적을 수행하며 선도했다. 그러나 장승원·박용하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회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고 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돼 사형을 당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이런 상황에도 한훈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대한광복회의 명맥을 이어갔다. 한훈은 만주를 오가며 새로운 항일투쟁 방법을 모색하던 중,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다시 국내로 잠입해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한훈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서울을 중심으로 광복단결사대 조직계획을 설명한 후 지원을 요청했다. 임정의 지원 약속을 받은 한훈은 1919년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한 후 모병(募兵)과 암살(暗殺)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 활동했다.
■ 계룡 신도안, 광복단 결사대 발원지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계룡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김광옥(金光玉, 두마면 왕치)·홍순봉(洪順奉:두마면 막은동)·김운서(金雲瑞:두마면 두계리) 등으로 김광옥, 홍순봉은 염기중 의병부대, 김운서는 이석용 의병부대에 각각 소속돼 군자금 모집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김광옥과 홍순봉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또, 정인행(鄭寅行)·권충락(權忠洛)·송종빈(宋鍾斌) 등도 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정인행은 두마면 용동리 출신으로 광복단 충청도지단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권충락은 두마면 석계리 출신으로 1919년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흥업단의 자금모금에 참여하던 중 1922년 5월 체포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권충락은 1943년 3월 9일 대구의 결혼 피로연장에서 일제의 가마니 강제 공출을 비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체포돼 1943년 5월 14일 소위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송종빈은 두마면 향한리 출신으로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 활동에 참여했다. 조선독립단은 부적면 출신인 이내수가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로, 이내수는 일제 은사금을 거부하고 자결 순국한 이학순의 아들이다. 이내수는 조선독립을 위해 1910년 5월경 논산군 두마면 향한리 송종빈의 집 거실을 근거지로 해 자금 조달을 모의했는데, 주목되는 점은 송종빈의 집이 조선독립단의 근거지였다는 점이다. 송종빈 집에서 단원들은 1919년부터 조선독립 격고문, 군자금 수령증 등을 만들었다. 송종빈은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단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지원 활동을 벌였으며, 1921년 10월경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징역 3년의 옥살이를 했다.
한훈은 1920년 2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광복단결사대 계획을 논의한 뒤 같은 해 3월 귀국해 박문용 등과 함께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 광복단결사대는 조선총독 과 친일관리들의 처단과 자금모집을 목표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해 1920년 8월 김상옥의 암살단과 연합,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 방한 시 남대문 역에서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환영 나온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 의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인 8월 23일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한훈을 비롯한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계룡시 신도안면 정장리 일원은 1920년 결성한 광복단 결사대 발원지가 됐다. 계룡시는 이 일대에 광복단결사대 기념탑을 세우고 해마다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